3화
‹ ›"오랜만이군."
노강호가 웃으며 말했다.
낮고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마치 오랜 지인을 만난 것처럼 태연한 말투.
그 얼굴은 뉴스에서 수백 번 본 얼굴이었다.
경제 신문 1면, 재계 순위 발표, 인터뷰 특집까지.
재벌 총수답지 않게 젊어 보이는 인상, 그러나 눈빛만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눈.
나는 케이블에 발목이 묶인 채 그를 노려봤다.
발목을 조인 케이블은 얇았지만 단단했다.
움직일수록 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끊어낼 방법이 없나.'
주변을 훑었다.
창고 안은 넓고 어두웠고, 곳곳에 놓인 조명 장치들이 붉은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 붉은 빛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때까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왜 이런 짓을."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목이 마른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노강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구두 굽이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유는 간단해. 네 사촌이 내 사업을 여섯 번이나 망쳤거든."
여섯 번.
숫자를 세듯이 명확하게 말하는 그 태도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강철거인은 이 일과 상관없어."
"상관없다니."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짧고 건조했다.
즐거움이 담긴 게 아니라, 어이없다는 투의 웃음.
"그놈에게 가장 아픈 방법이 뭘까 오래 생각했지. 정답은 간단했어. 너였어."
그 말이 귀에 박혔다.
'가장 아픈 방법.'
내가 그 방법이라는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손목의 시계 같은 장치를 눌렀다.
삐이이이이이—!
귀를 찢는 고주파음이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고막이 얼얼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조차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자세였다.
동시에 바닥의 붉은 빛들이 일제히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붉은빛이 순식간에 파랗게 물드는 광경은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뭐지.'
의문이 들 틈도 없이, 몸 안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번졌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감각.
마치 몸속 어딘가에 있는 수도꼭지가 강제로 열린 것 같은 감각.
물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
손끝에서 빛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작고 옅은 빛의 입자들이 피부를 뚫고 흘러나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게··· 뭐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노강호가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지켜봤다.
마치 실험용 쥐를 관찰하는 학자 같은 눈빛이었다.
"에너지 흡수 필드다. 네 몸에 흐르는 별빛 에너지를 강제로 뽑아내는 거지."
그는 마치 상품 설명서를 읽듯 건조하게 말했다.
억양도 없이, 감정도 없이.
"고통스럽진 않을 거야. 그냥 무력해질 뿐이지."
무력해진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말이 사실이었다.
고통은 없었다.
찌르는 듯한 통증도, 타는 듯한 열기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감각이 몸을 채웠다.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지는, 텅 비어가는 느낌.
몸의 무게마저 사라지는 것 같은 이상한 허탈함.
'이게 무력하다는 거구나.'
이제까지 살면서 힘이 없다는 게 이런 감각인지 몰랐다.
늘 힘이 있었으니까.
늘 별빛이 손끝에서 반응했으니까.
다리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시작된 무력감이 서서히 위로 번져갔다.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나는 억지로 버티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허벅지에 힘을 줘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신경이 끊긴 것 같았다.
허리가 움츠러들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몸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버텨봐."
노강호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버틸수록 재밌으니까."
'재밌다고.'
이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오락거리라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남은 힘을 손끝에 모으려 했다.
이가 아릿할 정도로 세게 물었다.
작은 빛 한 줄기라도 만들어내려는 시도였다.
손바닥 위로 희미하게 빛이 맺혔다.
'제발, 조금만 더.'
그러나 손바닥 위에 맺힌 빛은 곧 파란 필드에 빨려 들어가 흩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무하게, 순식간에.
'이럴 수가.'
몇 번을 더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빛이 맺히는가 싶으면 곧바로 사라졌다.
시도할수록 몸이 더 빠르게 지쳐갔다.
"평생 그 힘 하나 믿고 살았을 텐데."
노강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구두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또각, 또각.
일정한 박자로 다가오는 그 소리가 심장을 더 조여왔다.
"오늘부터는 그것도 없어."
담담한 어조였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무릎이 완전히 바닥에 닿았다.
털썩—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나는 어떻게도 막을 수 없었다.
바닥의 냉기가 무릎을 통해 온몸으로 퍼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허망함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위기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싸울 방법도 없고, 도망칠 힘도 없고, 그저 무너지는 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
노강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내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피부에 닿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거부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재밌는 부분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기대감마저 서려 있었다.
'재밌는 부분이라니.'
무엇이 더 남아 있다는 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자, 창고 벽 뒤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그보다 더.
어둠 속에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그림자들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
'제발.'
이번만큼은, 그 어떤 각오도 소용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