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적의 히어로, 전리품이 되다

1화

인천 외곽, 재개발이 멈춘 공단 지대. 녹슨 철제 담벼락과 깨진 유리창이 늘어선 이곳은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한 아스팔트 위로 먼지바람이 지나갔고, 버려진 컨테이너마다 스프레이로 낙서된 흔적만이 이곳에 한때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했다. 나는 이 구역을 담당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 그저 매일 같은 골목을 훑고 같은 담벼락을 지나치는 게 일이었다. '오늘도 조용하네.' 순찰을 시작하며 그렇게 생각했던 게 불과 오 분 전이었다. 무전이 울린 건 그 직후였다. "폭발음 신고 접수, 현장 인근 시민 다수 위험." 관제센터 목소리가 다급했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문장 사이에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위치는 옛 화진산업 창고 부지입니다. 서둘러 주세요." 나는 대답할 틈도 없이 몸을 띄웠다. * 발끝에서 별빛이 피어올랐다. 몸을 감싼 은백색 빛무리가 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시민이 위험하다면 1초도 늦으면 안 돼.' 이 능력을 얻은 뒤로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원칙이었다. 빛의 궤적을 그리며 나는 신고 지점을 향해 날았다. 도심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발밑으로 낡은 지붕들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속도를 높일수록 심장이 먼저 앞서 달렸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폭발이라면 화상, 파편, 최악의 경우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리에 더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도를 더 낮췄다. *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했다. 연기도, 화염도, 사람들의 비명도 없었다. 그저 낡은 창고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폭발이라고 했는데.' 나는 속도를 줄이며 고도를 낮췄다.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아보았다. 부서진 지붕도, 갈라진 벽도, 타버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폭발이 있었다면 최소한 열기의 잔재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창고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였다. '착오였나.'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뭔가 목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위화감이 떠나지 않았다. 지상에 내려서자 발밑에서 먼지가 일었다. 창고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도, 차량도, 심지어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무 조용해.' 도시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완전한 정적을 느낀 적은 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멀리서 들려야 할 도로 소음조차 뚝 끊긴 것 같았다. 마치 이 창고 하나만이 세상과 분리된 것처럼. 손끝이 저릿해졌다. '돌아가야 하나.'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스스로 밀어냈다. * 신고가 진짜였다면, 안에 다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창고 정문의 셔터를 손으로 밀어 올렸다. 끼이이이익— 녹슨 금속이 비명을 지르듯 갈렸다. 손바닥에 남은 붉은 녹 자국을 보며, 이 창고가 최소 몇 년은 방치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폭발이 있었던 곳 같지가 않은데.' 의심은 커졌지만 발은 이미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은 어둠이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완전한 암흑. 손바닥에 별빛을 모아 작은 등을 만들었다. 은은한 빛이 창고 내부를 비추자, 텅 빈 바닥과 쌓인 상자들만 눈에 들어왔다. 다친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핏자국도, 신음도, 쓰러진 몸도 없었다. 그저 먼지 쌓인 나무 상자들이 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상자 사이를 훑었다. 혹시 구석에 웅크린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몸을 낮추고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던 그 순간, 창고 전체에 목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왔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 낮고 여유로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나는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스피커를 통한 게 분명했지만, 그 능글맞은 어조만은 진짜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었다. "신고는 재밌었나?" 그가 물었다. 목소리의 톤에는 조롱이 짙게 배어 있었다. '노강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름이 떠올랐다. 사촌 오빠와 오랜 세월 대립해온 재벌 총수, 강철거인의 숙적. 손끝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몇 번이나 뉴스에서, 오빠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었던가. 번번이 사업을 방해하고, 뒤에서 검은 거래를 일삼는다던 그 사람.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위험 신호가 울렸다. '왜 여기에.' '왜 나를.'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놀라긴 이르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말투에는 여유가 넘쳤다. 마치 이미 승부를 다 결정해 놓고 관전하는 사람처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밑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웅— 하는 저주파가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번지는 그 낮은 울림에, 이가 저절로 딱딱 부딪혔다. '뭐지, 이 진동.' 기계 장치가 가동되는 소리 같았다. *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방금 들어온 셔터 문이 스르륵 닫히고 있었다. 철컹—! 무거운 소리와 함께 유일한 출입구가 봉쇄됐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나는 곧바로 셔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손바닥으로 별빛을 끌어모아 금속을 밀어내려 했지만, 셔터는 이미 바닥과 완전히 맞물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억지로 열려면 시간이 걸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속았다.' 확신이 들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몸을 틀기도 전에, 바닥 곳곳에서 붉은 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눈동자처럼,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붉은 점들이 창고 바닥과 벽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깜빡이며 나를 향해 초점을 맞추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건 함정이야.' 이제야 확실해졌다. 폭발 신고도, 텅 빈 창고도,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무대였다는 것을. 그렇다면 저 붉은 점들은. 등 뒤에서 노강호의 목소리가 다시 나지막이 울렸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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