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알파 셰프의 계약혼

1화

서울의 겨울은 유난히 맵고 건조했으며, 그 계절이 오면 오래된 주방장들은 손등이 갈라지는 걸 훈장처럼 여기곤 했는데, 이종에게도 그 계절은 익숙한 통증이자 동시에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열다섯 해를 주방에서 보낸 그는 미쉐린 별을 두 개나 받은 레스토랑의 총주방장이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도 일찍 여의어 오로지 칼과 불 앞에서만 온전해지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그를 두고 재능 있는 사람이라 말했지만, 그 재능이라는 말 뒤에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는 성격에 대한 조소가 섞여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 재능. 그 단어는 언제나 그의 외로움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그날 밤도 마감 뒤 홀로 남아 새 메뉴를 시험하던 중이었다. 겨울에 어울리는 뜨거운 소스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냄비 앞에 서 있었는데, 오래된 가스관에서 새어 나온 냄새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화구를 켠 것이 마지막이었다. 불길이 번지는 순간에도 그는 이상하게 담담했으며, 뜨거움보다 먼저 든 생각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소스에 대한 미련이었다는 것이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마지막 순간까지 요리를 생각하다니, 이것이 자신의 삶이었구나 하는 자각이 짧게 스쳤다. 그러고는 정적이 찾아왔다. 정적. 그 정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눈꺼풀 안쪽으로 붉은빛이 스며들며 낯선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화약 냄새 같기도 하고 향초 냄새 같기도 한 그 공기 속에서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는 걸 느낀 그는, 손끝을 움직이려다 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에 놀라 숨을 멈추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굵은 사슬이 매여 있었고, 등 뒤는 차가운 석벽에 밀착되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얼굴을 가리는데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럽고 낯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려 했으나 손가락이 가늘고 작았으며, 손톱 모양마저 낯설어서 마치 남의 손을 빌려 쓰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내려 하자 낮게 갈라진 소리 대신 처음 듣는 여성의 음성이 튀어나와 그는 잠시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몸을 살피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형체를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주변은 어두운 석실이었는데, 벽에 걸린 낡은 등불 하나가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오그라들었다. 바닥은 습기로 미끈거렸고, 어디선가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 몸이 누구의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으나,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래 갇혀 있었다는 감각, 오래 억눌려 왔다는 감각이 낯선 몸의 기억인지 자신의 죽음 이후의 시간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아직 명료하지 않았으나,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이 몸의 주인이 오랫동안 참아온 무언가가 있었던 것처럼, 근육 하나하나가 스스로 움직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사슬을 당겼다. 처음엔 미약한 저항에 불과했는데, 팔에 힘을 주자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벽에 박힌 고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고, 그 순간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오기가 앞섰다. 열다섯 해를 뜨거운 불 앞에서 버텨온 손이었으니, 낯선 몸이라 해도 버티는 법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이번엔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당기자 고리가 석벽에서 뜯겨나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손목이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뒤늦게 찾아왔고, 그보다 먼저 몸을 감싸던 억압이 풀려나가는 감각이 낯설고도 선명했다. 자유. 그 단어가 떠오르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것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발목의 사슬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고리가 뜯겨나갔을 때,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만끽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석실 저편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여러 개의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급하게 내려오는 게 들렸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그 규칙적인 울림만으로도 훈련된 이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3구역 이상 반응! 결속구 훼손 확인!"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창을 든 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하나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앞장선 자가 등불에 비친 그를 향해 창끝을 겨누며 소리쳤다. "미등록 개체가 결속을 끊었다! 전원 방어선 구축!" 뒤따르던 이들이 반원을 그리며 그를 포위했고, 창끝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이종은 방금까지 느끼던 해방감이 순식간에 다른 종류의 냉기로 바뀌는 걸 느끼며, 낯선 몸으로 처음 맞이한 이 세계가 결코 자신을 반겨줄 생각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개체.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사람이 아니라 개체. 등불 빛에 흔들리는 창끝들이 눈앞에서 번뜩였고, 앞장선 자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이 몸은 대체 무엇이었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창을 겨누고도 물러서지 않는 걸까.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쌓여갔지만,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슬이 풀려난 손목에서 흐르는 피가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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