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한 공주의 결핍

4화

"이서린." 도윤이 화롯불을 뒤적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신중했다. 부지깽이 끝이 잉걸불을 헤집는 소리만 오두막 안을 채웠다. 나는 뭔가 심각한 얘기가 나올 거라 짐작했다. 최준혁에 대한 얘기일까. 그가 우리를 찾아냈다는 소식일까. 아니면 도망 자금이 다 떨어졌다는 얘기일까. 남은 은자는 이미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이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쫓기며 사는 삶에 지쳤다고, 이제 그만하자고. '각오하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화로의 붉은 빛이 그의 얼굴 절반을 물들이고 있었다. "음, 그, 그러니까..." 그는 몇 번이나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부지깽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가 했다. "우리,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게... 나한테는 좀 힘들어서." "힘들다고." 나는 짧게 되물었다.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그만하자는 말인가.' "당신을 만족시켜줄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그것도 있는데..." 도윤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넘길 어색함이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힘겨워 보였다. 나는 침묵으로 그를 기다렸다. 화로 안에서 장작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우리... 다른 여자를 하나 더 들이면 어떨까." 순간 나는 그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높아졌다. "다른 여자랑, 셋이서... 그러면 당신도 부담이 덜하고, 나도..." 그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손짓까지 곁들여가며, 마치 미리 준비해온 논리를 펼치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오해하지 마.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셋이 있으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나눌 수 있잖아. 당신도 편해지고, 나도 편해지고. 요즘 계속 예민해 보였잖아, 당신. 그게 다 나 하나한테만 의지해야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그의 말투는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이 제안이 나를 위한 배려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듯한 얼굴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를 위한 배려일까.' 나는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화롯불 빛이 그의 눈동자에서 흔들렸다. 저 눈빛이 진심인지, 아니면 자기 욕망을 감추기 위한 연기인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혹시 이건 최준혁 때문에 지쳐서 하는 말일까. 도망 생활에 지쳐서, 뭐라도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히려 화가 조금 났다. "싫어." 나는 즉답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안 할래." "이서린, 내 말은..." "안 되지." 세 번의 단답이 이어지자, 도윤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손에서 부지깽이가 힘없이 흙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미안해. 갑자기 이런 말 해서." 그가 작게 사과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의 불빛만 조용히 흔들렸다. 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완전히 편해지지 않았다. 거절은 확실했는데, 그 뒤에 남은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을까.' 나는 그의 옆얼굴을 다시 살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혹시, 이 사람은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걸까.' 근방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떠올려보았다. 물을 길으러 다니던 여인, 혹은 장을 봐주던 아낙. 도윤이 유난히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던 얼굴들이 몇 있었다. 그중 누구였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일까. 그 의심은 곧 스스로 지워버렸다. 지금 그런 걸 의심할 여유가 없었다. 최준혁의 추격이라는 훨씬 더 무거운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그가 언제 이 산골까지 냄새를 맡고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런 사소한 의심으로 마음을 낭비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이성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그날 밤 도윤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나는 그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보고 있으니,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정함으로 포장된 제안.' 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나를 위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었을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지만, 하필 이런 순간에 그런 말을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만약 진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다면, 저렇게 셋이서 지내자는 말이 아니라 그냥 떠났을 텐데.' 그 생각에 이르자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완전히 놓이지는 않았다. 도윤은 나를 두고 쉽게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이런 어설픈 제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수도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잠이 들었다. 꿈자리마저 어수선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오두막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각이었다. 밖은 희끄무레한 새벽빛으로 가득했다. 노파였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다급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나물이나 곡식 몇 됫박을 들고 느긋하게 인사부터 건넸을 사람이, 오늘은 문지방을 채 넘기도 전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서린, 큰일 났어."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이미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근방 마을에... 최준혁의 정찰대가 나타났대." 그 순간 밤새 나를 괴롭히던 의심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잠들어 있던 도윤도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얼굴에서도 순식간에 잠기운이 걷혔다. "몇 명이나." 내 물음에 노파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나도 몰라. 마을 사람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만 들었으니까. 근데... 이서린,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 근방을 이미 훑고 있다는 것 같더라고."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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