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중개인님, 저 살 수 있는 거죠?

5화

며칠이 지났다. 나는 도시에 조금씩 적응해갔다. 아침에는 근처 시장을 둘러봤다. 좌판마다 낯선 과일들이 쌓여 있었고, 어떤 것은 색이 푸른빛을 띠면서도 냄새는 익숙한 사과 향이 났다. 상인들은 손목에 찬 밴드를 화면처럼 두드려 결제를 마쳤고, 나는 그 모습을 몇 번이나 곁눈질로 훔쳐봐야 했다. (여기선 지갑도 카드도 필요 없구나) 낮에는 도서관 비슷한 정보센터에 갔다. 그곳은 조용했다. 햇빛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책상 위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각자 단말기 앞에 앉아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앉아 이 세계의 규칙을 하나씩 배웠다. 화폐 단위는 익숙했지만 결제 방식이 달랐다. 통신 기기는 손목에 차는 밴드 형태였고, 화면을 켜면 옅은 푸른빛이 손등을 덮듯 번져 나왔다. 뉴스에서는 종종 몬스터 관리국 소식이 흘러나왔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어조로 사건을 전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일상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긴… 원래 살던 곳이랑 근본적으로 다르구나) 정보센터를 나서면서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거리의 간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 하늘을 가로지르는 낯선 형태의 비행체까지.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그 미묘한 간극이 나를 계속 붙잡았다. 정호는 종종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방은 언제 들어가실 겁니까." "조금 더 준비하고요." "…그러시죠. 급할 거 없습니다." 정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뭔가를 더 말하고 싶지만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몇 번이나 움직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태민씨." "네." "그… 다래 씨 회사, 한빛이주솔루션이라고 하죠." "네, 맞아요." "저는 오래 그쪽과 거래해왔지만, 사실 뭘 하는 회사인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정호는 말을 잠깐 멈췄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쪽에서 데려오는 사람들이 보통…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삼촌의 마지막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낡은 방, 텅 빈 냉장고,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촌의 뒷모습.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겠지) 정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호기심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조심하세요. 그쪽 회사가 무엇을 하든, 그 안에서 손해 보는 건 결국 이쪽 사람들이니까요."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정호는 그 뒤로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고, 나는 그 등을 한동안 바라봤다. 넓은 어깨, 조금 굽은 등, 그리고 창밖을 향한 시선. 그 모습이 어쩐지 삼촌과 닮아 보였다. (아니야… 착각이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밀어냈다. 그날 밤, 나는 임시 거처 창가에 앉아 삼촌을 떠올렸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점점이 퍼져 있었다. 그 불빛들은 낮에 본 것과는 다른 색으로, 붉은빛과 푸른빛이 섞여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면서도 자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기억 속의 방, 기억 속의 냉장고, 기억 속의 그 뒷모습을. 삼촌은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었고, 술을 마시면 더 조용해졌다. 가끔 나에게 밥을 챙겨줄 때도 말없이 그릇을 내려놓기만 했다. 그가 죽던 날 아침, 나는 삼촌의 방문 앞에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학교에 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도, 평소와 다르지 않던 정적도, 그때는 그저 아침의 한 조각으로만 지나쳤다. (그때… 내가 뭔가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죄책감은 늘 몸속 깊은 곳에 눌러앉아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몸은 나아졌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히려 낯선 세계에 놓이고 나서야 그 감정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그 기억만이 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창밖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가는 밤바람이었을 소리가, 그날은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파문을 남기며 지나갔다. 나는 그 낯선 감각에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창가에 몸을 기댔다. 다래가 방문을 두드린 건 그때였다. 똑, 똑. "들어가도 될까요." "네…" 다래는 조용히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표정은 여느 때처럼 잔잔했지만, 뭔가 평소와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그녀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살짝 움켜쥐어졌다가 다시 풀렸다. "태민 씨." "네." "이 세계로 오시게 된 게, 완전히 우연은 아니었어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쿵.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래는 잠깐 침묵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바람, 같은 커튼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마치 다른 방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씩 알게 되실 거예요. 지금은… 아직 말씀드릴 때가 아니라서요." "다래 씨."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제가 뭘 알아야 하는 건가요." 다래는 나를 마주 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어떤 확신을 느꼈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요함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곧, 제가 다시 찾아올 거예요." 다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움직임은 언제나처럼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속에 어떤 결심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그때 필요한 이야기를 전부 해드릴게요. 그리고… 부탁드릴 일도 하나 있어요." "부탁이요." 다래는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등 뒤로 스며드는 조명 때문에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실루엣만이 문틀 안에 서 있었고, 나는 그 그림자를 향해 몇 마디를 더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조금 특별한 곳에 들어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끝으로 다래는 문을 닫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오래 남았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방금 들은 말을 되짚었다. (특별한 곳이라니… 그게 어디를 말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장소를 떠올려봤지만,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호가 했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그쪽 회사가 무엇을 하든, 그 안에서 손해 보는 건 결국 이쪽 사람들이라는 말. 그 말과 다래의 말이 머릿속에서 겹쳐지며 불편한 잔상을 남겼다. 창밖의 밤은 여전히 어두웠다. 불빛들은 그대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의 어둠은 조금 더 짙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바람 소리와 방 안의 정적이 뒤섞이며, 그 이질적인 파문이 밤이 깊도록 나를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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