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탐정님, 저도 용의자인가요?

4화

저택의 하루는 점점 소연에게도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자리 잡아 갔다. 아침이면 마당의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며 구구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우고, 낮이면 한서령을 따라 시장이나 관아 근처를 오가며 잔심부름을 하고, 밤이면 사랑방에 쌓인 서찰들을 정리하는 일이 어느새 그녀의 일과로 굳어졌다. 처음에는 낯설고 서툴렀던 손놀림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서찰의 봉투를 뜯지 않고 접힌 순서대로 갈무리하는 법이나, 먹물이 마르지 않은 종이를 함부로 겹쳐놓지 않는 법 같은 것들을 소연은 저도 모르게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한서령이 옷을 갈아입다가 소매 끝의 실이 풀린 것을 발견하고는 낮게 혀를 찼다. "쯔쯔, 이런." 짧은 탄식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짜증이 방 안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었고, 소연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바늘과 실을 챙겨 다가갔다. "제가 손보아 드리겠습니다." "됐다, 내가 하지." "어, 어차피 저도 익숙하니, 그냥 맡기시지요." 한서령은 못마땅한 얼굴로 소연을 흘겨보았지만, 소연이 물러설 기색 없이 바늘에 실을 꿰는 모습을 보고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밀었다. "그럼 빨리 해라. 오래 걸리면 재미없을 줄 알고." 그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소연은 이제 그 딱딱함 속에 숨은 것이 진짜 짜증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소연은 그 손목을 살짝 붙잡은 채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등불 아래 드러난 한서령의 팔은 마치 옥으로 깎아놓은 듯 매끄러웠고, 옷감 사이로 비치는 창백한 색깔이 오히려 이 저택의 어둑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렸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소연은 온몸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서령의 피부는 창백한 겉모습과 달리 뜻밖에도 따뜻했고, 그 온도가 손끝을 타고 팔 전체로, 다시 어깨를 지나 목덜미까지 번지는 듯했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심장을 세게 두드렸고, 소연은 애써 태연한 척 바느질에 집중했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늘 끝이 두어 번 헛돌았고, 그럴 때마다 소연은 속으로 '정신 차려, 이건 그냥 바느질이야, 바느질일 뿐이야' 하고 되뇌었지만, 그 다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한서령 역시 평소와 다르게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옆얼굴이 마치 세필로 그려낸 그림처럼 정갈했다. 창백한 뺨에 아주 옅은 홍조가 스치는 것을, 소연은 우연히 곁눈질로 보고 말았다. 저 사람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소연의 귀 끝이 화끈 달아올랐다. 방 안에는 오직 실이 옷감을 지나가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낮게 울렸고, 그 침묵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 좁혀놓는 듯했다. "다 되었습니다." 소연이 실을 끊어내며 조심스레 말하자, 한서령은 서둘러 팔을 거두어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음, 그럭저럭 쓸 만하군." 짧은 인정의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다는 것을 소연은 눈치채지 못한 척 넘어갔다. 대신 바늘과 실을 챙기며 딴청을 부렸는데, 손끝에는 여전히 그 온기의 잔상이 남아 있어서, 실을 감는 손놀림이 평소보다 유난히 느렸다. 그날 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서령이 문득 물었다. "너는 원래 어디 출신이지."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소연은 그 물음 속에 담긴 것이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연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여섯 해 계약으로 이 저택에 팔려 왔다는 사연을 짧게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진 빚이 커서, 어머니가 대신 저를 이곳에……." 말을 잇다 목이 살짝 메었지만, 소연은 애써 담담한 척 끝을 맺었다. 한서령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별다른 위로도, 동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을 뿐인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이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 사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말을 아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소연은 생각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어째서 이런 큰 저택에 혼자 살고 있는지, 어째서 사람들이 그녀를 '한 탐정님'이라 부르는지—소연은 그저 찻잔의 온기에 손을 녹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런 얼굴 할 필요 없다." 한서령이 문득 낮게 말했다. "지난 일이니." "네?" "빚 이야기 말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으로 되었다는 뜻이다." 그 말이 어찌나 무뚝뚝하게 들렸는지, 소연은 잠시 그것이 위로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뭉근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소연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저녁이 깊어갈 무렵, 대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하인 하나가 숨이 찬 채로 뛰어들어왔다. "한 탐정님! 큰일 났습니다, 박헌수 어르신께서……!" 소연과 한서령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감돌던 따뜻한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하인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독을 드시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셨다 합니다!" 한서령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안개 낀 숲이 갈라지며 서슬 퍼런 칼날이 드러나는 듬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도포를 챙겨 입었고,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방금까지 소매 끝실이 풀려 소연에게 바느질을 맡기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소연, 채비해. 지금 바로 나가야 한다." "네, 네!" 소연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겉옷을 걸쳤다. 방금까지의 다정하던 분위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팽팽한 긴장만이 남아 있었다. 이 사건이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흔들어놓을지는, 그날 밤의 소연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당을 나서기 직전, 비둘기가 낮게 구구 소리를 내며 울었다. 평소라면 그저 흔한 새소리였을 텐데, 그날 밤만큼은 그 소리가 어쩐지 불길한 전조처럼 소연의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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