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탐정님, 저도 용의자인가요?

2화

부엌은 좁고 어두웠지만, 소연은 물을 끓이는 동안 집 안 구석구석을 재빠르게 훑어보며 이곳의 규칙을 스스로 파악해 나갔다. 그릇은 늘 한쪽으로 정갈하게 쌓여 있었고, 벽에 걸린 약초 다발은 종류별로 색이 다르게 묶여 있었는데, 그것만 보아도 이 집의 주인이 얼마나 정확하고 결벽한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이런 집에서 그릇 하나를 잘못 놓으면 무슨 벌을 받게 되는 걸까, 소연은 속으로 셈을 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벌금은 없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실없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소연은 마당의 비둘기에게 밥알 몇 개를 던져주었고, 그 작은 새가 총총거리며 다가와 쪼아 먹는 모습을 보며 잠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부리가 밥알을 콕콕 찍어내는 소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소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적어도 이 집에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이 하나쯤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비둘기는 사람 눈치를 볼 줄 몰랐고, 그래서 더 정직해 보였다. 솥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하자 소연은 서둘러 불을 줄이고, 선반 위에 놓인 낡은 다기들을 눈으로 훑었다. 어느 것이 손님용이고 어느 것이 주인용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릇의 닳은 정도와 놓인 위치만 보아도 대략 짐작이 갔다.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반이겠구나, 소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장 깨끗해 보이는 잔을 골라 들었다. "물은 다 끓었나." 한서령이 소리 없이 다가와 어깨 너머로 부엌을 들여다보았을 때, 소연은 놀라서 어깨를 움찔했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사람이라니, 대체 어떻게 그리 조용히 걷는 걸까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예, 예. 다 되었습니다." 소연은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애쓰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찻잎은 왼쪽 항아리에 있는 걸 써." 그렇게 말한 뒤 한서령은 부엌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문득 소연이 정리해 둔 그릇들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누가 이렇게 놓으라 했지." 그 물음 하나에 부엌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소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크기별로, 자주 쓰시는 것을 앞쪽에 두시는 듯하여, 그대로 따라 놓았습니다." 그 말에 한서령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는데, 그것이 놀라움인지 흥미인지는 소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세필로 그린 듣 단정한 옆얼굴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만은 분명했다. "……제법이군." 한서령은 그렇게 짧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고, 소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잘렸다는 소리는 아니니, 오늘 하루만 지켜보겠다던 말이 어쩌면 조금은 늦춰질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소연은 그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듣 서둘러 찻상을 챙기고 다기를 올렸다. * * * 찻상을 들고 사랑방으로 들어서자, 한서령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낡은 지도와 알 수 없는 서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종이 더미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일렁였고, 방 안에는 묵향과 마른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거기 두고 나가." 짧은 명령에 소연은 조용히 찻상을 내려놓았고, 그 순간 서찰 사이에서 삐죽 튀어나온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인장이 찍힌 그 종이는, 다급하게 쓰인 필체로 보아 최근에 도착한 의뢰인 것 같았다. 소연은 발을 떼려다 멈칫했다. 궁금해하지 말자, 저건 내 일이 아니다, 하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지만 눈은 이미 그 붉은 인장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뒤집힌 채 찍힌 인장이라니, 저런 건 급박한 상황에서나 나오는 실수가 아니던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러가라 했는데." 한서령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지만, 소연은 발을 떼지 못한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 서찰의 인장, 뒤집혀 찍혀 있는 것이…… 급하게 봉인한 흔적인 듣한데, 무슨 사건이신지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소연은 아차 싶었다. 규칙도 정해지지 않은 첫날부터 이런 걸 묻다니, 제 발로 무덤을 파는 격이 아닌가. 한서령은 놀란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서찰을 뒤집어 감췄다. 그 손짓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무언가를 숨기다 들킨 아이 같았다.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 달리 미세한 흔들림이 섞여 있었다. 소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인은, 겉으로는 냉랭해 보여도 속마음을 감추는 데 서툰 사람이구나, 하고.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도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걸 보니, 어쩐지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나가보겠습니다." 소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얼른 방을 나섰지만, 문을 닫으며 슬쩍 돌아본 한서령의 옆모습은 여전히 서찰 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 저 인장에, 대체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 걸까. 소연의 궁금증은 밥알을 쪼아 먹던 비둘기처럼, 콕콕 마음 한구석을 쉼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 * * 그날 밤, 한서령은 소연을 사랑방으로 다시 불러들여 짧게 말했다. "당분간은 곁에 두겠다. 대신 규칙이 있다." 촛불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고, 한서령의 표정은 낮에 보았던 것보다 한층 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규, 규칙이라 하시면……" 소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내 서류에는 손대지 말 것." 한서령은 손가락 하나를 꼽으며 말했다. "밤에는 마당의 새를 반드시 챙길 것." 두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그리고 내가 묻지 않은 것은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 것." 세 번째 손가락까지 접히자, 한서령은 그 손을 소연 쪽으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어길 시엔, 그날로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 소연은 그 세 가지 규칙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고개를 숙였다. 서류에 손대지 말 것,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를 챙기는 것도,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규칙, 묻지 않은 것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그 말은, 오늘 낮 서찰 앞에서의 자신을 떠올리게 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찰 속 인장에 대한 궁금증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호기심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소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소연은 겨우 그렇게 대답했지만, 방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세 가지 규칙 중 어느 하나도 완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불안한 예감이, 등 뒤로 스멀스멀 따라붙었다. 그렇게 임시 동거의 첫날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조용히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방문 너머로 새어 나오던 촛불 그림자는,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은 채 서찰 더미 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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