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성 북촌의 골목은 이른 아침부터 인적이 드물었는데, 새벽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돌담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들어 강소연의 발끝을 자꾸만 움츠러들게 했다. 소연은 그 고요한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눈앞의 대문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검은 기와를 얹은 담장이 유난히 높았고, 문 위에 걸린 작은 나무 현판에는 '탐정 한서령'이라는 글씨가 힘 있는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저 이름 하나가 이 골목 전체의 공기마저 눌러버리는 듣한 기분이었는데, 소연은 그 무게가 자신에게도 곧 얹힐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은 알지 못했다.
소연을 이곳까지 끌고 온 중개인은 문을 두드리며 연신 굽실거렸고, 그 옆에서 소연은 여섯 해라는 계약 기간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이렇게 낯선 집의 종으로 팔려가는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반년, 두 번째는 석 달, 그리고 이번에는 여섯 해라니. 남은 빚의 액수를 머릿속으로 다시 헤아려보던 소연은, 이번에는 제발 오래 붙어 있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바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문이 열리는 순간 곧바로 드러났다.
문을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저택의 주인, 한서령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검게 소용돌이치는 곱슬머리, 그리고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소연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리는데, 그 시선이 마치 값을 매기는 상인의 눈처럼 차갑고 정확했다. 남성용 복식을 갖춰 입은 그녀의 자태는 세필로 그린 초상화처럼 정갈했고, 옷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어깨선이 아침 햇살 아래서 서늘한 윤곽을 그려냈다. 어두운 색조로 물든 입술이 살짝 비틀리며 말을 뱉었다.
"이게 뭐지."
"강, 강소연이라 하옵니다. 오늘부터……"
"손을 보여봐."
한서령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고, 소연은 얼떨결에 두 손을 내밀었다. 흙이 낀 손톱과 갈라진 손끝을 내려다보던 한서령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는데, 그 미간의 주름 하나조차 소연에게는 판결문처럼 느껴졌다.
"손질도 안 된 몸으로 내 집에 들어오겠다는 건가."
"그, 그것은…… 오는 길이 험하여서……"
소연은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는데, 부끄러움인지 억울함인지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새벽부터 짐을 이고 걸어온 길이 몇 리였는지, 중간에 흙탕물을 건너다 발이 빠진 것이 몇 번이었는지, 그 모든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입은 자꾸만 헛돌았다.
한서령은 팔짱을 낀 채로 대문 안쪽으로 몇 걸음 물러섰고, 그 뒤를 따라 소연이 조심스레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정갈하게 다듬어진 석등과 나지막한 담장 아래로 이끼가 자란 흔적이 이 집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마당 한쪽 나무 그늘에는 회색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사람이 다가와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이 집의 유일한 다정함처럼 보였다. 소연은 그 비둘기를 보며 잠시나마 마음이 놓였는데, 적어도 저 새는 자신을 값어치로 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장장 여섯 해 계약이라 들었는데, 벌써 물러줄 수도 없다는 게 문제군."
한서령이 중개인을 향해 던진 말에 중개인은 연신 손을 비비며 웃음을 지어 보였고, 그 굽신거리는 태도가 오히려 소연의 속을 더 뒤틀리게 했다. 어찌 저 인간은 내 앞날이 저울질당하는 이 순간에도 저리 태연히 웃는단 말인가. 소연은 그 대화를 들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물러준다니, 그 말이 곧 자신이 팔려나갈 수도 있다는 뜻임을 모를 리 없었다.
"물러주는 것이 계약서상 가능한 일입니까." 중개인이 조심스레 묻자 한서령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자네는 그저 하루 뒤에 다시 와서 결과를 들으면 된다."
그 말에 중개인은 마치 무거운 짐을 벗은 사람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소연은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가벼운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나는 손이 굼뜨고 냄새나는 아랫사람은 필요 없다." 한서령은 짧게 그렇게 말한 뒤 소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초록빛 눈동자에는 이미 판결이 끝난 듣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오늘 하루만 지켜보고 돌려보내겠다."
그 말에 소연은 억울함과 다급함이 동시에 밀려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냄새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는 길에 흙탕물을 건너와서…… 씻으면, 씻으면 금세 나아질 것이옵니다."
하지만 말은 끝을 맺지 못한 채로 흐려졌고, 한서령은 이미 등을 돌려 안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가 어찌나 곧고 단호한지, 마치 발끝조차 흐트러짐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소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는데, 저 여인의 등에서마저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듣했다. 이런 사람 밑에서 여섯 해를 버텨야 한다니, 아니 그보다 먼저 오늘 하루조차 버텨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중개인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나자, 마당에는 소연과 비둘기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소연은 손끝에 남은 흙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이대로 쫓겨나면 다음 갈 곳이 어디일지 막막해졌다. 여섯 해의 계약이 하루 만에 끝나버린다면, 남은 빚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을 다시 사겠다는 이가 나타나기나 할까, 하는 현실적인 셈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계약금이 얼마였는지, 하루치 셈은 어찌 되는지, 혹여 위약금이라도 물게 되는 것은 아닌지, 온갖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소연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비둘기는 여전히 나무 그늘 아래서 소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너도 참 안됐다'고 말하는 듣해서 소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정신줄은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안채 쪽에서 한서령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기 서서 뭘 하는 거지.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여."
명령인지 시험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에, 소연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부엌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마당을 두어 바퀴 헤매다가 겨우 아궁이가 보이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그 순간부터 이 낯선 집에서의 하루가, 위태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하루만 지켜보겠다는 그 말이, 소연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