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감금된 지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시계도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방법이 아예 없어서, 나는 예린이 방에 들어오는 횟수로 시간을 셈했다. 하루에 두세 번,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게 아침이거나 저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처음엔 식사를 가져다주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를 나눠보려 했는데, 그마저도 규칙적이지 않았다. 어떤 날은 세 번, 어떤 날은 두 번. 그 간격도 매번 달랐다.
벽지는 하얀색이었고, 조명은 늘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그 조도가 오히려 신경을 갉아먹었다. 눈을 감아도 그 빛이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예린은 하루에 두세 번씩 방에 들어왔다. 식사를 가져오고, 손목의 끈을 확인하고, 짧게 이야기를 나누다 나갔다. 손목의 끈을 확인할 때마다 그녀의 손끝이 내 피부에 닿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마다 그녀는 조심스러웠다. 끈을 너무 세게 조이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매듭을 살짝살짝 눌러보고는 다시 물러났다.
그녀는 늘 웃고 있었다. 방에 들어올 때도, 식사를 내려놓을 때도, 나갈 때도. 그 웃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제는 구분할 수 없었다. 처음 며칠은 그 웃음이 소름 끼쳤다. 사람을 가둬놓고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 웃음 뒤에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그냥 웃음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힌 뒤 나는 방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목의 끈은 느슨해서 침대 근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침대에서 세 걸음 정도. 그 이상은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옷장을 열어보았다. 옷 몇 벌뿐이었다. 사이즈를 보니 전부 내 몸에 맞을 만한 것들이었다. 누군가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서랍장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서랍 안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뭘 기대했던 걸까. 탈출할 수 있는 도구? 전화기? 그런 게 이렇게 순순히 놓여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밑을 살펴봤다.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는데,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손끝에 뭔가 딱딱한 게 스쳤다.
낡은 노트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쌓인 걸 보니 오래 방치된 것 같았다. 침대 밑 깊숙한 구석, 벽에 거의 붙어 있어서 아무렇게나 훑어봤다면 놓쳤을 위치였다. 손을 뻗어 꺼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가죽이었는지 인조 소재였는지 모를 표지는 손에 닿는 느낌이 낡고 부드러웠다. 오래 만졌던 흔적처럼.
첫 장을 넘기자, 낯선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또박또박한, 지나치게 정갈한 글씨였다.
"오늘도 완벽해야 한다. 엄마가 그랬다. 강예린은 실수하면 안 된다고."
"학교에서 웃는 연습을 했다. 거울 앞에서 30분.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규칙을 외우는 것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다음 장을 넘겼다.
"진짜 나는 어디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진짜 나를 보여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필체가 점점 흐트러졌다. 처음엔 정갈했던 글씨가 뒤로 갈수록 삐뚤어지고, 어느 부분은 글자가 겹쳐 쓰여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같은 사람이 쓴 게 아닌 것처럼.
어느 페이지엔 같은 문장이 스무 번쯤 반복되어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 문장은 페이지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줄이 끝나면 다음 줄로, 그 줄이 끝나면 또 다음 줄로. 마지막 줄은 글씨가 거의 종이를 뚫을 것처럼 눌러 쓴 흔적이 있었다. 나는 그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정말 그 예린이 쓴 걸까. 완벽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 사람이.
몇 장을 더 넘기자 날짜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정확한 숫자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낙서처럼 그려진 작은 그림들이 있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 웃는 모양의 동그라미들. 전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몇 장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준은 나를 안 무서워했다. 나를 특별하게 안 봤다. 그게 좋았다. 그게 유일하게 진짜 같았다."
"서준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내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그녀를 안 무서워했다고 느낀 게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봐도 특별한 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대했을 뿐인데.
손이 떨렸다. 노트를 덮고 다시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원래 있던 위치, 원래 있던 각도로. 혹시라도 그녀가 알아챌까 봐 몇 번이나 손끝으로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완벽한 아이돌이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방으로 돌아가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예린은 실수하면 안 된다고. 진짜 나를 보여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서준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이용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런 도덕적 고민이 아니었다. 여기서 나가는 것. 그게 전부였다.
***
그날 밤, 예린이 다시 들어왔다.
식사 쟁반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물었다.
"오늘은 어때? 심심하지 않았어?"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면서 노트 속 문장들을 떠올렸다. 거울 앞에서 30분씩 연습했다던 그 웃음이 지금 이 얼굴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너, 어릴 때부터 완벽해야 한다는 말 많이 들었지."
그녀의 손이 순간 멈췄다. 쟁반을 내려놓던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린 것처럼.
"...뭐?"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했다고 그랬잖아."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눈동자가 커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짧은 순간, 완벽하게 유지되던 얼굴 근육이 전부 풀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진짜 표정을 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노트 봤어. 침대 밑에."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쟁반 위 숟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딸그락 소리를 냈다.
"...그건, 보면 안 되는 거였어."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방 안이 갑자기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완벽한 척 안 해도 되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잖아."
"...그만해."
그녀의 목소리가 거의 애원처럼 들렸다. 그런데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그럼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노트 얘기도, 여기 있었던 일도."
그녀는 한참을 침묵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무너지는 걸 보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세워져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몇 번이나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아니, 어떤 말을 해도 무너질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볼게."
그 대답이 나온 순간, 나는 처음으로 여기서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짧고 날카로운 벨소리였다. 방 안의 정적을 단번에 깨는 소리였다. 그녀의 몸이 그 소리에 반응하듯 움찔했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표정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딱딱해졌다.
"안 돼..."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엄마가 온대. 지금."
그 한 마디가 방 안의 온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방금까지 무너지려 했던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다시 단단해졌다. 마치 스위치를 켠 것처럼, 조금 전의 흔들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 조용히 있어야 해. 알겠지?"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다급함 속에는, 내가 처음 보는 종류의 공포가 배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내게 보여줬던 어떤 표정보다도, 그 공포가 훨씬 진짜처럼 느껴졌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또각.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