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손목에 감긴 밧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거친 섬유가 피부를 긁었다. 손끝이 저릿하게 마비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이나 힘을 줘봤지만 매듭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조여올 뿐이었다.
좁은 방 안엔 불빛 하나 없었다. 커튼 틈으로 새어드는 가로등 불빛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 빛조차 희미해서, 방 안의 형체들은 그저 어둠보다 조금 더 짙은 그림자로만 존재했다. 곰팡내 비슷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넌 이제 내 것이야."
예린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웃고 있었다. 목소리의 결마다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귓속에서 맥박 소리가 쿵쿵 울렸다.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해보면 그날부터였다. 강예린의 고백을 거절한 그날.
***
3주 전, 선일고등학교 2학년 3반.
나는 그저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그렇게 3년을 흘려보내는 게 목표였다. 급식 줄에서도 맨 뒤에 섰고, 발표 시간에는 최대한 존재감을 숨겼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반에서 유일하게 말을 트는 애는 재현이었다. 재현은 늘 스마트폰을 붙잡고 뭔가를 보다가 나를 툭툭 치곤 했다.
"야, 강예린 또 실검 떴다."
나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봤다.
"몰라도 돼."
"모를 수가 없지. 우리 학교 애가 실검에 뜨는데."
재현이 화면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강예린이 교내 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진행하는 영상 캡처였다. 조회수가 벌써 몇십만이었다.
"이거 봐라, 댓글 좀. 여신이네 뭐네."
"관심 없다니까."
"넌 진짜 특이한 애야. 학교에 이 정도 유명인이 있는데 관심이 없다니."
강예린. 선일고의 얼굴이라 불리는 아이였다. 학생회 부회장이었고, 교내 방송반 아나운서였고, SNS 팔로워가 몇만 명이었다. 얼굴도 예뻤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완벽했다.
완벽한 애들은 대체로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에 사는 법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5월 초였다.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는데, 누군가 맞은편에 앉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도 없이 자리를 채우는 인기척이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강예린이었다.
"여기 자리 있어?"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게 끝이었다. 그날은.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도서관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였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이 넓지도 않았고, 그 자리가 창가 쪽이라 인기가 많은 자리였으니까.
매점에서도 마주쳤다. 급식실 줄에서도 마주쳤다. 심지어 학원 앞 버스정류장에서도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자주였다.
재현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강예린이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되는 소리인데. 야, 생각해봐. 걔가 왜 매점에서 너 옆줄에 서겠냐. 걔 팬클럽 애들이 줄 서서 자리 맡아줄 판인데."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강예린 같은 애가 나 같은 애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학생회 일로, 방송반 일로, 아니면 그냥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애들로. 나는 그 반대였다.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고, 딱히 특출난 것도 없는 그런 애였다.
그래도 이상한 기분은 조금씩 쌓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뭔가를 관찰하듯 오래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은 복도에서 그녀와 어깨가 스쳤다. 사과할 새도 없이 그녀는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도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날, 6월의 어느 늦은 오후.
청소 당번이었던 나는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섰다.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교실 안의 책상들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고, 칠판엔 지우다 만 낙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 소리가 텅 빈 공간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나와는 다른 리듬의 발소리였다. 뒤돌아보니 예린이 서 있었다.
"서준아,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응. 왜?"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
그녀가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뒤따랐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 노을빛이 창문을 통해 계단참으로 길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너 좋아해."
짧고 명확한 문장이었다.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말을 그대로 꺼내는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네가 나한테 관심 없다는 게, 오히려 좋았어."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좋아서가 아니라, 당황스러워서였다.
"...미안한데,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그런 거?"
"연애 같은 거. 관심받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말을 하면서도 이게 맞는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엔 실망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서늘한 정지 상태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뭔가 잘못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다시 웃었다.
"그래. 알았어."
너무 빨리 회복된 웃음이었다. 방금까지의 서늘함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의 밝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나 먼저 갈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노을을 바라봤다. 뭔가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과를 한 것도 아닌데, 왠지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웃음이 사라진 그 짧은 순간의 눈빛. 그게 왜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평소처럼 잠들었다. 특별한 꿈도 꾸지 않았고, 평소와 다른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밤이었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는 길에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발신자 이름도 없이, 그냥 숫자로만 표시된 번호였다.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누구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그 번호는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문자를 지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