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뒤 밤, 벙커 안의 모든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초록빛 비상등만이 복도를 희미하게 비추던 시각, 한서연은 잠든 척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이준서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노크 소리는 두 번, 짧고 낮았다. 이준서는 그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는 사실이 낯설어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는 동안 잠시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방문을 열자 어둠 속에 서 있는 어머니의 실루엣이, 평소보다 더 야위어 보이는 어깨선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잠깐 통제실로 와줄래." 한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딘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이준서는 아무 말 없이 슬리퍼를 꿰신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걷는 동안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되울렸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서 이준서는 괜히 숨을 죽였다.
통제실에 들어서자 형광등 대신 비상등 하나만이 켜져 있어 공간 전체가 붉은빛과 청록빛이 뒤섞인 기묘한 음영으로 물들어 있었다. 콘솔 화면들이 대기 상태로 낮게 깜박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한서연은 익숙하게 콘솔 앞 의자를 끌어와 앉았고, 이준서는 그 옆자리에 조심스레 몸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스칠 듯 가까워졌지만 누구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한서연은 오래 참아온 무언가를 마침내 꺼내놓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깊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 숨소리가 어찌나 무거웠던지, 이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손끝으로 콘솔 모서리를 몇 번 매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왜 그렇게 된 건지, 계속 궁금했지?"
이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초등학교 시절 부모의 방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던 낮은 언쟁 소리를 들으며, 그 균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죄책감을 품어왔던 터였다. 이불 속에서 귀를 틀어막으며 잠든 척했던 밤들, 이수아가 옆에서 뒤척이며 "오빠, 우리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지?" 하고 속삭이듯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해주면서도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던 그 수많은 밤들이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가 급격히 소원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쌍둥이 육아의 고단함 때문일 거라 짐작해온 시간들. 나 때문일까, 나랑 수아 때문에 두 사람이 저렇게 된 걸까. 그 물음을 그는 십육 년 가까이 마음 한편에 접어두고 있었다.
"네가 두 살 때, 아빠가 설악산 근처에서 낙상 사고를 당했어." 한서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마치 오래전에 이미 외워둔 문장을 읽는 것처럼 건조했지만, 그 건조함 아래 억눌린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이준서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때 척추 신경이 크게 다쳤고, 걷는 것도 오래 재활해야 했는데, 그것보다 더……."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시선을 손끝으로 떨어뜨린 채 이었다. 손톱 끝이 콘솔 표면을 긁듯 미끄러졌다. "그 사고 이후로 남편으로서는, 그러니까 부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됐어. 신경이 그쪽으로 안 통한다고 했어.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육 년째 부부가 아닌 채로 살아온 거야."
이준서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명치에 얹혀 있던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갑자기 자리를 옮기는 것 같은, 그런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그토록 오래 자신의 탓이라 여겨온 부모의 불화가, 실은 자신이 태어난 지 겨우 이 년 만에 벌어진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도 이수아도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몸 하나에 있었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우리 때문이 아니었어. 그 안도감과 동시에, 십육 년을 잘못된 죄책감 속에서 살아온 자신에 대한 억울함이 명치 언저리에서 뒤섞여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억울해서, 그리고 허탈해서 웃음이 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상한 이중의 감정이었다.
"그럼 엄마는, 그동안……." 이준서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그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어야 했다. "그동안 어떻게 버틴 거예요."
한서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오래 눌러온 한숨에 가까웠다. "버틴 게 아니라 그냥 살아진 거지. 사랑도 없이, 손 한번 잡는 것도 의무처럼."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사람은 자기가 망가진 몸이라는 걸 견디지 못해서 점점 더 벽을 쌓았고, 나는 나대로 그 벽 앞에서 늙어갔어. 처음엔 서운했는데, 나중엔 그냥, 서운한 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준서는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항상 벙커의 규율과 생존을 우선시하며 흔들림 없어 보이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이런 균열을 발견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한서연이 시선을 들어 이준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붉은 비상등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깊고 축축하게 빛났다. "네가 지금 그렇게 내 옆에서 손을 잡아주니까, 십육 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 온기가 뭔지 알겠더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통제실 안의 정적이 유난히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준서는 자신의 손이 언제부터 어머니의 손을 마주 쥐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 그 온기가 지나치게 따뜻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감각.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위로인지, 아니면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을 이미 넘어버린 것인지 스스로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속으로 되뇌면서도 손을 놓지는 못했다. 한서연 역시 아들의 손을 놓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침묵은 모자 관계라는 이름으로는 더 이상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콘솔의 대기음만이 낮게 웅웅거리며 그 정적을 채웠고, 이준서는 자신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 애썼다.
바로 그때, 콘솔 화면 한쪽 구석에서 지금껏 한 번도 울린 적 없던 경고음이 낮게 삐-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어 두 사람 다 그대로 굳어 있었지만, 소리는 점점 또렷해지며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되었다. 이준서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화면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외부 신호 감지 — 출입구 상부 진동 센서'라는 문구가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한서연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핏기가 가시는 것을, 이준서는 놓치지 않았다.
벙커 바깥, 지표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강철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