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거긴 아직 들어가면 안 돼."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낮게 깔려왔을 때, 이준서는 화면을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가리며 몸을 홱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는데, 이 벙커 안에서 아버지와 가족을 제외한 타인의 존재를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실용적인 작업복을 걸친 그녀는 걸음걸이마저도 이 공간의 구조를 완벽히 꿰고 있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으며, 자신을 강미래라고 소개하며 벙커의 식자재와 생활 물류를 관리해왔다고 짧게 덧붙였는데, 그 말투에 스며 있는 익숙함이 처음 만난 사람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해서, 이준서는 속으로 이 여자가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오래 아버지와 이곳을 드나들었는지 의문이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고개만 뻣뻣하게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가 등을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이준서는 방금 화면에 떠 있던 낯선 얼굴과 지금 눈앞의 여자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위화감을 애써 지워버렸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가족 넷과 강미래가 처음으로 한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스테인리스 식기가 부딪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울리는 정적 속에서 한서연은 낯선 여자의 존재를 곁눈질로 살피며 접시 위의 죽만 숟가락으로 휘휘 젓고 있었고, 이강호는 태블릿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죽 한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손끝으로 액정을 넘기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냈으며, 이수아는 오빠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고는 식탁 밑에서 손톱만 뜯어댔다. 강미래는 이 모든 어색함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죽을 뜨고 있었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식탁 위의 긴장을 더 팽팽하게 조여왔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결국 한서연이었다.
"이 사람은 뭐야, 강호 씨. 언제부터 알던 사이인데 우리한테 한마디도 없었어?" 목소리는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아래 오랫동안 눌러온 무언가가 미세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숟가락을 쥔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이준서는 놓치지 않았다.
"필요한 사람이었어." 이강호가 태블릿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식탁 위에 떨어지자 한서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필요한 사람? 십구 년을 같이 산 나한테는 한마디도 없이, 벙커를 짓고, 사람을 들이고, 아들 이름까지 저 시스템에 박아 넣으면서." 한서연의 손이 식탁을 짚은 채 파르르 떨렸고,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당신, 나한테 뭘 또 숨기고 있는 거야?" 이강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여유로운 냉소가 걸려 있었다.
"숨긴 게 아니라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거고, 당신은 늘 그렇게 다 안다는 얼굴을 하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으며, 마치 오래전에 이미 결론 내린 사안을 다시 설명하는 듯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두 사람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자 이수아는 슬그머니 의자를 밀고 자리를 피했고, 강미래마저 조용히 그릇을 챙겨 부엌 쪽으로 사라졌지만, 이준서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손에 쥔 숟가락이 무겁게 느껴졌고, 목구멍이 서서히 조여오는 감각에 물조차 삼키기 힘들었다. 그 순간 한서연이 마침내 눌러왔던 말을 터뜨렸다.
"당신이 대체 나한테 남편이었던 적이 있기는 해? 십육 년이야, 십육 년을 손 한번 제대로 안 잡고, 벽 보고 사는 것처럼 살았는데,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그 여자 때문에?" 식탁 위로 그릇 부딪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적이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순간 이강호의 얼굴에서 여유롭던 냉소가 지워지고, 대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애써 목소리를 낮췄다. "그 얘긴 그만하자."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균열이 있었다.
그러나 한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왜, 아파? 그 얘기만 나오면 늘 그렇게 도망갔잖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강호의 손이 식탁 모서리를 짚었는데,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잠시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쉬는 동안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다는 것을, 오직 맞은편에 앉은 이준서만이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마에 맺힌 그 땀방울 하나가, 어떤 말보다도 더 크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도 수치심도 아닌, 순수한 신체적 고통의 흔적이었다. 오래전 산행 중 낙상 사고로 척추 신경이 손상된 이후, 이강호는 하반신의 감각 일부를 잃었고 그로 인해 부부관계는 물론 걷는 것 자체도 오랜 재활을 거쳐야 했다는 사실을, 이준서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부모 사이의 십육 년에 걸친 침묵과 정확히 맞물려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짐짓 여유로운 얼굴 뒤에 숨겨온 것이 저런 통증이었다는 사실을, 이준서는 그 순간 처음으로 짐작했다. 왜 아버지는 늘 저렇게 태연한 척했을까. 그 태연함이 사실은 십육 년치의 고통을 눌러 담은 가면이었다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채로 서로를 원망만 하며 지낸 걸까.
한서연은 남편의 안색이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강호는 홀로 식탁에 남아 태블릿 화면을 다시 켰다. 손끝으로 화면을 두드리는 그의 동작에는 방금 전의 동요를 지우려는 듯한 인위적인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업무용 문서가 아니라, 낯선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영상 통화 대기 화면이었다. 이준서가 그것을 목격한 순간, 아버지가 황급히 화면을 꺼버렸지만,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각인된 얼굴은 다름 아닌 조금 전 부엌에서 스쳐 지나간 강미래였다.
……!!
이준서의 시선이 아버지의 뒷모습과 이미 꺼져버린 화면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갔다.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이 들었고, 방금 눈앞에서 본 것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이는 걸음으로 서재 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준서는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저 여자가 대체,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