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뒤, 도윤의 자취방 거실에는 텔레비전 불빛만이 파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낮은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캔맥주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언제 뜯었는지 모를 과자 봉지가 반쯤 구겨진 채 벌어져 있었다. 소파는 두 사람이 앉기에 넉넉하지 않은 크기였고, 그래서 서준의 무릎과 도윤의 무릎 사이 간격은 손바닥 하나만큼도 채 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준은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턱을 괴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화면이 아니라 옆에 앉은 도윤의 옆얼굴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도윤은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은 자세로, 그날 병원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는 듯 보였다.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물어봐도 돼?"
서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뭘."
"언제부터 그랬어. 사람 손 못 만지는 거."
도윤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정적을 대신 메우는 동안, 그의 시선은 화면도 서준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손끝으로 소파 천의 보풀을 매만지는 동작이 몇 번쯤 반복되었다.
"어릴 때."
마침내 도윤이 입을 열었다.
"아빠가 술 마시면 손이 먼저 나갔어. 엄마도 알았지만 모른 척했고."
그 말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자체가, 오히려 감정을 더 많이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몇 번이고 되뇌어 이제는 문장의 결이 다 닳아버린 것처럼.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누가 손 뻗으면 몸이 먼저 굳는 거."
'아빠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다음부턴 안 그런다고 했잖아.'
어린 도윤이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이, 지금 이 순간 아무 맥락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말을 믿었더라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만 도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아주 천천히 포갰다. 그 속도는 마치 놀란 짐승을 다루듯 조심스러웠고, 손바닥이 닿는 면적을 조금씩 늘려가는 방식이었다. 도윤은 움찔했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얘기 처음 해봤어."
도윤이 덧붙였다.
"아무한테도."
"고마워."
"뭐가."
"말해줘서."
서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텔레비전 속 웃음소리는 여전히 이어졌지만, 그 소리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침묵 속에서 도윤이 문득 물었다.
"넌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줘. 그냥 친구인데."
그 질문에 서준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눈동자가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도윤을 향해 천천히 올라왔다. 목소리는 평소의 나른함을 벗고,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건조함을 띠고 있었다.
"그냥 친구가 아니니까."
"뭐?"
"2년 전부터, 너 좋아했어."
그 말이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다른 밀도로 바꿔놓았다. 텔레비전 소리마저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고, 캔맥주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탁자 위로 툭, 떨어지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준을 바라보았고, 서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위장 연애 하자고 했을 때, 사실 좀 웃겼어. 나한테는 이미 진짜였거든."
서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그 갈라짐은 아주 작아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정도였다.
"근데 너 부담될까 봐 말 안 했어. 지금도 말할 생각 없었는데."
"그런데 왜."
"네가 물어봤잖아."
서준은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어딘가 씁쓸한 것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 참아온 것을 겨우 내려놓은 사람의 웃음처럼.
도윤은 자신의 손 위에 놓인 서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굵고, 손톱 끝이 조금 짧게 정리되어 있는 손이었다. 그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도가, 지금껏 자신이 알던 어떤 접촉과도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사람의 체온이었는데도 그것이 낯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윤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도윤이 겨우 입을 열었지만, 그 뒷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정확히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문장이 목 안에서 걸린 채 부서졌고, 그 파편들을 다시 주워 모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서준은 그런 도윤을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포개어진 손을 조금 더 꽉 쥐었을 뿐이었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그 침묵조차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의 위장 연애는 더 이상 '위장'이라는 이름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텔레비전은 자정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챈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
다음 날 아침, 도윤은 알람보다 먼저 진동으로 잠에서 깼다. 휴대폰 화면에는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고, 화면 밝기에 눈이 부셔 도윤은 몇 초간 눈을 찡그린 채 문장을 다시 읽어야 했다.
'오랜만이야, 도윤아. 나 지훈이야. 이번 주말에 얼굴 좀 보자.'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손끝의 온도가 아주 조금 낮아지는 것을 도윤은 느꼈다. 어젯밤 서준의 손이 남기고 간 온기와는 정반대의 감각이었다.
지훈.
그 이름 석 자가 화면 위에서 몇 번이고 눈에 밟혔다. 도윤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문질러보았지만, 문자는 지워지지 않았고 발신 번호 역시 그대로였다.
왜 하필 지금일까.
도윤은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어젯밤 자신의 손 위에 놓여 있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도윤은 끝내 떨쳐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