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접촉공포 소년의 위장연애

2화

캠퍼스 뒤편 벤치는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나른하게 데워져 있었고, 그 위로 은행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게 마른 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벤치 다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가 흩어졌다. 이서준은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친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팔뚝을 타고 올라간 잉크빛 타투와 다소 거친 인상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곤 했지만, 정작 그 눈빛은 나른하고 온화한 편이어서, 오래 마주 보고 있으면 오히려 그쪽이 먼저 시선을 피하게 만드는 종류의 눈이었다. 도윤은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이 평소보다 느렸고, 교복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안에서 계속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서준은 그 걸음걸이만 보고도 무슨 얘기가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갔다. 2년을 붙어 다니다 보면, 상대의 보폭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읽히는 법이었다. 도윤이 벤치 옆에 다다르자 서준은 자리를 조금 옆으로 옮겨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도윤은 앉지 않고 잠시 서 있다가, 결국 서준과 한 뼘쯤 거리를 두고 걸터앉았다. "할 말 있다며." 서준이 먼저 운을 뗐다. 도윤은 잠시 시선을 발끝에 두었다가 다시 들었다. 그 잠깐 사이 벤치를 스치던 바람이 도윤의 앞머리를 흩트려놓았지만, 도윤은 그걸 넘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결혼하래." "뭐?" 서준의 눈썹이 순간 치켜 올라갔다. "우리 엄마가. 다음 달에 상견례 잡아놨대." "너 열여덟이야." "알아." "그런데 결혼을 해?" "회사 사정 때문이래. 상대 쪽 투자를 받으려면 결혼이 필요하다나." 말을 마친 도윤의 목소리 끝이 살짝 잠겼다. 사실 그 얘기를 들은 건 어제저녁, 식탁 위에 놓인 접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던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말했다. "상대 집안이 나쁘지 않아. 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물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그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도윤은 그날 밤 내내 천장만 바라보다가, 결국 서준을 떠올렸다. 서준은 잠시 말을 잃은 채 도윤을 바라보았고, 그 침묵 속에서 바람이 벤치 사이를 스치며 낙엽 몇 장을 굴렸다. 낙엽이 벤치 다리에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다. "그래서, 어쩌려고." 도윤은 손끝으로 벤치 나무 표면의 결을 따라 그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손톱 밑에 나뭇결의 거친 감촉이 걸렸지만, 그것마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랑 사귀는 척하고 싶어." 그 말이 나온 순간, 서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라고." "너랑 사귄다고 하면 엄마도 억지로 결혼시키진 못할 거야. 남자 만난다고 하면 그쪽 집안에서도 거절할 테고." 도윤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밑에 어떤 절박함이 깔려 있다는 걸 서준은 모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2년 동안 거의 매일 붙어 다녔고, 도윤이 누군가의 손도 견디지 못한다는 것도, 그 이유는 몰라도 그 증상 자체는 서준이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급식실 줄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던 것을, 체육 시간에 짝을 지어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도윤이 슬쩍 자리를 피하던 것을, 서준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만약 소문나면 너희 엄마도 알게 될 텐데." "알아도 상관없어. 오히려 알아야 돼." 도윤은 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방식으로 다정한지, 도윤 자신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서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 시선 끝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만에 다시 시선을 내렸을 때, 서준의 눈동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온도를 담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 붙이기는 어려웠다. "조건이 있어." 서준이 다시 도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뭔데." "연습이라도, 진짜처럼 해야 돼. 어설프면 금방 들통나." "연습이라니."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남들 보는 데서 자연스럽게." 도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주머니 속 손이 저도 모르게 옷감을 움켜쥐었고, 그 힘 때문에 손끝이 하얘졌다. "...그건." "싫으면 관두든가." 서준의 말투는 가볍고 나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진짜 연인처럼 보이려면, 도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 서준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도윤이 술에 취해 딱 한 번, "누가 만지면 숨을 못 쉬겠어"라고 중얼거리던 밤이 있었다는 것을. 그 이유를 캐묻지 않은 건 서준 나름의 배려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배려를 접어두어야 했다. 도윤은 오래 침묵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그 대답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윤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벤치를 타고 오르던 오후의 온기도, 그 떨림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준은 그 떨림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을 슬쩍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듯한 손짓이었다. 손등에 걸린 잉크빛 타투가 햇빛을 받아 옅게 번들거렸다. 도윤은 그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 손톱 끝, 손바닥의 굳은살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듯이.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마침내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얹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온몸이 뻣뻣해졌지만, 놓지는 않았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서준의 체온이 낯설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고, 도윤은 그 열기를 견디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서준은 그런 도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두었다. 마치 이 정도의 접촉조차 도윤에게는 하나의 시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이 위장 연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두 사람 모두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을, 이 오후의 벤치 위에서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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