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세계 태아(世界胎兒)를 흡수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 것'이라는 감각을 느꼈다.
작고 여린 세계 하나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씨앗 상태의 세계는 아직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백지 같았다. 산도 강도 하늘도 없었다. 그냥 가능성 덩어리였다.
'이게... 세계라는 건가.'
나는 신기해서 이리저리 그 감각을 만져봤다. 내 안에서 작은 세계가 꿈틀거렸다. 마치 갓 부화한 병아리가 알 껍데기 안에서 꼬물거리는 느낌이랄까.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자꾸 만지고 싶고, 들여다보고 싶고.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죽어서 이상한 존재가 됐는데 감상은 여전히 인간적이라니, 나 자신도 웃겼다.
'죽어서도 이 지랄이구나.'
씨앗은 내가 건드릴 때마다 조금씩 반응했다. 아주 미세하게, 온도가 바뀌는 것처럼. 따뜻해졌다가 차가워졌다가. 나는 그게 좋아서 몇 번이고 쓰다듬듯 의식을 갖다 댔다. 이건 무슨 애완동물 키우는 기분이다-생각하며 나는 실없이 웃었다.
그런데 그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한 허공 저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까 느꼈던 그 시선의 주인이었다. 이번엔 시선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밀려오고 있었다.
쿠구구구.
소리랄 것도 없는 진동이 무한 허공을 뒤흔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건 나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씨앗을 만지며 놀던 손이-정확히는 손이라 할 것도 없는 감각이-그대로 굳었다.
'세계수... 라고?'
그 존재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한 건 순전히 직감이었다. 뿌리처럼 뻗어오는 거대한 형체, 그리고 그 뿌리 하나하나에 매달린 수많은 흔적들 — 삼켜지고 뜯어먹힌 다른 세계들의 잔해. 그 잔해들은 아직도 미약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죽지도 못하고, 소화되지도 못하고, 그냥 매달려서 썩어가는 것처럼. 그걸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새끼, 지금까지 저런 걸 얼마나 많이 처먹은 거야.'
욕이 절로 나왔다. 무서워서 그런지,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욕부터 나왔다. 인간이었을 때 습관이 이럴 때 튀어나오는구나 싶었다. 하긴, 뭐. 이런 상황에서 고상하게 격식 차릴 놈이 몇이나 있겠나.
나는 도망쳤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이, 그냥 그 거대한 존재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무한 허공은 넓었지만, 세계수의 감각은 더 넓었다. 마치 온 사방에 눈이 달린 것처럼, 내가 어디로 튀든 뿌리 하나가 미리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챙-
아니, 챙 소리가 날 리는 없는데. 뭔가 스치는 감각이 딱 그런 소리로 들렸다. 뿌리 끝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존재의 일부가 뜯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프다. 아니, 아픈 게 아니라...'
뭐라 표현할 말이 없었다. 살점이 뜯기는 통증이 아니라, 내가 나라는 사실 자체가 지워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방향을 틀었다. 씨앗을 품은 채로, 그 씨앗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죽는다, 진짜.'
이 도망이 얼마나 계속됐는지 모른다. 시간 개념이 없는 곳이니까.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억겁 같았다. 나는 지치지도 않는 몸으로 계속 도망쳤고, 세계수는 지치지도 않는 채로 계속 쫓아왔다. 뿌리가 뻗어올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피할 때마다 심장이-심장이 있을 리 없는데도-쿵쿵 뛰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스쳤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저 뿌리 끝에 매달린 잔해들 중 하나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싫다. 그건 진짜 싫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서 낯선 파동을 느꼈다.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결이 다른, 더 촘촘하고 복잡한 파동. 마치 살아 움직이는 지성체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같았다. 수많은 목소리, 수많은 숨결이 뒤섞인 듯한, 그런 웅성거림.
'세계다. 완성된 세계.'
나는 순간 판단을 내렸다. 저곳으로 숨는다. 완성된 세계라면 세계수도 함부로 손을 못 댈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없지만 절박한 도박이었다. 근거 따위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나. 지금 이 순간 붙잡을 수 있는 건 그 파동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파동을 향해 존재 전체를 던졌다. 세계수의 뿌리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등 뒤로-등이 있을 리 없는데도-소름이 쫙 돋는 감각이 스쳤다. 뿌리 끝이 거의 닿을 듯 말 듯, 나를 삼키기 직전까지 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감각의 세계로 굴러떨어졌다.
시야가-시야라는 게 다시 생겼다는 것부터 이상했지만-빛으로 가득 찼다.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누군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낯선데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뭐지, 여긴...'
나는 그 감각의 홍수 속에서, 세계수가 아직 나를 쫓아왔는지조차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낯선 육신의 감각에 통째로 삼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