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세계를 삼키기로 했다

2화

무한 허공(無限虛空)에는 위도 아래도 없었다. 좌도 우도 없었다. 앞도 뒤도 없었다. 그냥 텅 빈, 완벽하게 텅 빈 무언가였다. 좌표도 방향도 존재하지 않는 곳. 그리고 그 텅 빈 곳에서 나는 문득 '나'라는 걸 자각했다. '여긴 어디지.' 첫 생각이 이거였다. 죽어서 저승이라도 온 줄 알았다. 근데 저승치고는 너무 심심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불도 없고 유황 냄새도 없고, 염라대왕도 안 보이고, 하다못해 저승사자 명단 확인하는 컴퓨터 한 대도 없었다. 그냥 무(無)였다. 뭐 이런 저승이 다 있나. 서비스가 이래서야 원. 나는 이도훈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지구에서 뭘 하다 죽었는지는 몰라도 — 아마 사고였겠지, 아니면 그냥 재수가 없었거나, 어쩌면 누가 뒤에서 밀었을지도 모르지 — 이름만은 붙잡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다 잊어도 이름은 안 잊는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유독 미련이 많았거나. 하긴, 이렇게 허무하게 갈 팔자였으면 미련이라도 남아야 공평한 거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엔 시간을 잴 수 있는 기준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해도 안 뜨고 달도 안 뜨고, 하다못해 시계 초침 소리 하나 없었다. 나는 그저 존재했다. 의식만 남은 채로, 텅 빈 공간을 표류했다. 표류라는 말도 웃긴 게, 흘러갈 물살조차 없는데 뭘 표류한다는 건지. 그냥 정지해 있었다는 게 맞을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묘한 느낌이었다. 뭔가 내 안에서 형태를 갖추는 느낌. 인간의 몸이 아니라, 뭐랄까 — 그릇 같은 게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텅 비어 있던 의식에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에 뭔가를 담을 수 있게 됐다. 마치 빈집에 방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처럼, 없던 벽이 세워지고 없던 문이 생겼다. '이게 뭐야.' 나는 당황했다. 손도 없는데 뭘 만져볼 수도 없고, 눈도 없는데 뭘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이게 참 미친 게, 감각기관이 하나도 없는데 확신만은 또렷했다. 나는 신물(神物)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계를 담는 그릇. 정확히 말하면, 세계의 씨앗 — 세계 태아(世界胎兒)를 흡수하고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아니 나는 그냥 지구에서 살던 이도훈인데 갑자기 무슨 신물이야.' 속으로 발악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몸에 새겨지는 감각 — 정확히는 몸도 없는데 새겨진다는 표현이 웃기지만 — 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 같은 거였다. 마치 누가 정해놓은 각본을 그냥 읽어 내려가는 기분. 그 각성의 완성 즈음, 저 멀리서 뭔가 아른거렸다. 빛이라고 하기도, 소리라고 하기도 애매한 무언가. 하지만 분명 '느껴지는' 것이었다. 작고, 여리고, 갓 태어난 것 같은 파동. 마치 손끝에 닿을 듯 말 듯한 온기 같기도 했고, 귀에 겨우 들릴 듯한 숨소리 같기도 했다. '저게 세계 태아인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그쪽으로 — 방향이랄 것도 없는 곳으로 — 다가갔다. 마치 배가 고픈 것처럼. 실제로 배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 갈증은 진짜였다.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허기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파동은 더 선명해졌다. 작은 세계 하나가, 완전히 자라기도 전에 무한 허공에 떠돌고 있었다. 불안정하고, 위태롭고, 곧 사라질 것 같은 여린 존재였다. 마치 아직 껍질도 여물지 않은 알처럼, 살짝만 건드려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 '먹어도 되나.' 순간 망설였다. 인간이었을 때의 도덕관념이 마지막으로 발동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뭐랄까, 갓 태어난 걸 잡아먹는다는 게 껄끄러웠다. 근데 그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고픔이랄지, 본능이랄지 — 뭔가가 나를 떠밀었다. 도덕이고 나발이고, 그릇은 채워져야 한다는 원초적인 법칙 같은 게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 세계 태아를 향해 손을, 아니 존재 전체를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멀리서 — 정말 아득히 먼 곳에서 — 무언가 거대한 것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는 걸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몸도 없는데 소름이 돋는다는 게 웃기지만, 진짜였다. 그 시선은 무겁고, 오래되고, 배가 고픈 짐승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수만 년을 굶은 무언가가, 이제 막 눈을 뜨고 나를 발견한 듯한. '뭐, 뭐야 저건.' 심장도 없는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근데 도망칠 다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미 늦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저 세계 태아를 삼켰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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