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의했더니 무림 최약체였다

1화

청운문(靑雲門)의 뒷산은 언제나 조용했다. 선진우는 그 조용함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폐물이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 그런 것들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사람의 말보다 자연의 소리가 훨씬 다정했다. 열여섯이 되도록 무혼(武魂)을 각성하지 못한 자. 족장의 아들이면서도 문파 안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앉는 자. 그것이 선진우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같은 나이의 아이들은 이미 무사 제1중, 제2중의 경지를 밟고 있었다. 무혼을 각성하지 못한 것은 수련의 부족이 아니었다. 타고나는 것이었고,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노력의 부족으로 몰아붙였다. "오늘도 여기 있었느냐." 선 족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진우는 급히 몸을 일으켜 예를 취했다. "아버님." 그의 목소리엔 반가움과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족장의 발소리는 언제나 무거웠다. 뒷산 어디에서든 그 소리를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족장은 아들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손이 크고 두꺼웠다. 수십 년 검을 쥔 손이었다. 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선진우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따뜻함이었다. "무혼이 늦게 트이는 이들도 있다. 조급해하지 마라." "예...." 선진우의 대답은 짧았고, 그 뒤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말이 위로일 뿐, 확신이 아니라는 것을. 문파의 어른들은 이미 그를 버린 자식처럼 취급했다. 족장의 체면 때문에 겉으로만 예를 갖췄을 뿐이었다. 방금까지 뒷산을 오르내리며 마주쳤던 장로들의 시선이 떠올랐다. 그들은 선진우를 볼 때마다 눈을 슬쩍 피했다. 마치 재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몇몇은 대놓고 혀를 찼다. '족장님 체면만 아니었으면 벌써 문파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뒤에서 그런 말이 들려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진우는 그 모든 것을 견뎌왔다.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족장은 아들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선진우는 그 자리에 한참 더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깃을 흔들었다. '언젠가는....' 그는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찾지 못했다. 언젠가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 뒷산에서 내려오는 길, 또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물 공자님 오신다." 누군가 낮게 웃었다. "조심들 해라. 무혼 없는 자한테 밟히면 큰일이지." 다른 목소리가 맞받았다.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선진우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참는 것도 이제 익숙하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익숙함이 상처를 없애주지는 않았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상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었다. 선진우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그들은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댈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파 안뜰을 지나칠 때, 사범들이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퍽! 목검이 부딪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저 소리 속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었다. 무혼이 없는 자는 정식으로 검을 배울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날 저녁, 족형제인 선지목이 그를 찾아왔다. 선지목은 진우보다 두 살 위였고, 이미 무사 제3중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문파 내에서도 젊은 층 중 상당한 재능으로 인정받는 자였다. "진우야, 내일 혼령림 근처로 사냥을 나간다는데 너도 같이 가겠느냐?" 선지목이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이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선진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혼령림은 외문 제자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문파의 전설에는 그 안개 속에서 실종된 자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떠돌았다. 무혼이 없는 자신을 그런 곳에 데려가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곳에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제안이 의심스러웠으나, 오랜만에 받은 초대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선진우는 지난 몇 년간 그 어떤 무리에도 끼지 못했다. 사냥이든 수련이든, 언제나 혼자였다. 그런 그에게 선지목의 제안은 가뭄에 내리는 비처럼 느껴졌다. '혹시 이제라도....' 그는 그렇게 기대를 품었다. 혹시 이제라도 자신을 족형제로 받아들여 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같이 가겠습니다." 그는 결국 그렇게 답했다. 외로움이 경계심을 이겼다. 선지목은 그 대답을 듣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선진우는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 다음 날, 혼령림 어귀에 이르렀을 때 선지목의 태도가 달라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가는 길 내내 화기애애했던 대화도 뚝 끊겼다. 숲의 초입에 다다르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짙은 안개가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너 혼자 가야겠다." 선지목이 말했다. "...예?" 선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뒤에서 다른 족형제들이 걸어 나왔다. 셋이었다. 모두 그를 둘러싸듯 섰다. 그들의 눈빛에는 조롱도, 동정도 없었다. 오로지 냉랭함뿐이었다. "족장님 아들이라고 감싸주는 것도 이제 지친다." 선지목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대(代)의 수치야." 그 말이 선진우의 가슴을 관통했다. 지금까지 뒤에서 들었던 어떤 조롱보다 더 날카로웠다. 왜냐하면 그것을 정면에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뱉었기 때문이다. "지목 형님, 그게 무슨....." "닥쳐라." 다른 족형제 하나가 끼어들었다. "형님이 아니라 그냥 지목이라 불러도 된다. 넌 우리 대의 일원도 아니니까." 선진우는 뒷걸음질쳤다. 등 뒤로 절벽의 낭떠러지가 느껴졌다. 발밑의 흙이 부서져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만 더 물러나면 끝이라는 걸 알았지만,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셋의 눈이 그를 향해 있었다. 도망칠 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잘못은 없다." 선지목이 대답했다. "네가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일 뿐이지." 그 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수십 년 검을 쥔 손을 가진 아버지의 온기가 떠올랐다. 조급해하지 마라, 그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목소리도, 그 온기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밀어라." 선지목이 짧게 명령했다. 손이 뻗어왔다. 쉭- 선진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에도 그는 손을 뻗어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기뿐이었다. '아버지....' 그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바람이 그를 삼켰다. 낭떠러지 밑, 짙은 안개를 두른 혼령림의 심연으로 그는 끝없이 떨어져 갔다. 떨어지는 동안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절벽 위에서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지목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죄책감도, 승리감도 없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무심함뿐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선진우의 의식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낡고 거대한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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