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관리인의 붓끝이 서류 위에서 멈춘 것은, 붉은 글씨로 처분이라는 두 글자를 마무리 짓기 직전이었다. 관리인은 노년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붓을 힘주어 쥐고 있었는데, 벼루 옆에 놓인 죽간에는 이미 서준의 이름과 죄목이 나란히 적혀 있어, 붓끝이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손끝이 종잇장에 닿기 전에 방준혁이 목검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며 낮게 말을 던졌다.
"멈추시오."
방준혁의 목소리에는 조롱도 짜증도 아닌, 알 수 없는 흥미가 실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나와 관리인의 붓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마치 새로 산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것과 같아서, 관리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종놈은 내 소유물이오. 처분이 필요하다면 내 손으로 하겠소."
관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규율을 운운했지만, 방씨세가에서 2공자의 말을 거스를 만한 담력을 지닌 자는 흔치 않았으니, 그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고는, 결국 서류를 접어 소매 속으로 밀어 넣고는 마른기침을 두 번 뱉으며 물러났다. 그 발걸음이 급하게 회랑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방준혁은 목검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준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두려움 속에서도 방준혁의 저 흥미가 결코 자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손끝이 저절로 떨려와 서준은 그것을 감추려 손가락을 말아 쥐었는데, 그 손등 위로 얼어붙은 땅의 냉기가 스며들어 뼈마디까지 얼얼했다. 겨울바람이 관사의 처마 끝을 훑고 지나가며 눈가루를 흩뿌렸는데, 그 서늘한 결이 마치 앞날을 미리 알리는 조짐처럼 서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담장 너머에서는 이택수와 순영이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채, 숨소리조차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택수의 손바닥에는 오랜 농사일로 굳어진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는데, 그 손이 순영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순영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계속 되뇌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도인지 애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저 아들의 목숨을 향한 간절함 그 자체였다. 담장의 틈으로 겨우 비쳐드는 좁은 시야 속에서, 두 사람은 숨 한 번 크게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그저 눈으로만 아들의 안위를 좇고 있었다.
그 순간, 관사의 회랑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러나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가라앉히는 듬직한 걸음걸이였다. 마치 겨울 산의 무게가 그대로 걸어오는 듯하여, 관사 마당에 서 있던 하인들조차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쳤다. 방준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방씨세가의 가주 방천호가 그곳에 서 있었다. 흰 수염이 성긴 턱을 감싸고 있었고, 눈빛은 오래 묵은 칼날처럼 차갑고 정제되어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 도포의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을 뿐, 그 외에는 미동조차 없어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서준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시선이 얼굴이 아니라 서준의 손끝, 정확히는 손가락 끝의 미세한 굳은살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서준 본인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 굳은살은 무기를 오래 쥐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흔적이었으니, 방천호의 눈이 그 위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준혁아." 방천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깔린 위압감은 관사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저 아이의 눈을 보아라."
방준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준을 내려다보았다. 서준은 고개를 든 채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는 이미 사람을 죽여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늘이 서려 있었다. 방천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수많은 무인들을 보아온 그의 눈에는, 저 눈빛이 결코 평범한 종놈의 것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롭구나."
그는 짧게 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회랑 안쪽으로 사라졌는데, 그 뒷모습이 완전히 그림자 속으로 스러질 때까지 방준혁은 미간을 좁힌 채 서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저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방준혁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마치 뾰족한 가시처럼 가슴 한구석에 박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부로 넌 내 전용 종자다." 방준혁이 서준의 어깨를 목검 끝으로 툭 건드리며 내뱉었다. "살고 싶으면 내가 부르는 대로 움직여라."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조의 오만함이 짙게 배어 있었으나, 그 밑바탕에는 방금 본 아버지의 반응에 대한 미묘한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으나, 가슴속에서는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한 걸음 물러났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저 오만한 공자의 그림자 아래 살아가야 한다는 불안이 뒤섞여, 서준의 속은 마치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서늘해졌다.
담장 밖에서 지켜보던 이택수의 무릎이 저절로 꺾여 그대로 눈밭에 주저앉았고, 순영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흘러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이택수는 언 땅에 무릎을 박은 채로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저 아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 하나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했다. 순영은 그런 남편의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냈다.
그날 저녁, 눈발이 조금씩 굵어지며 관사 지붕 위로 소리 없이 쌓여갔는데, 그 고요한 눈송이들 사이로 방천호가 문틈으로 흘려보낸 한마디가 관리인의 귓가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저 아이를 눈여겨보아라. 계속."
관리인은 그 말의 무게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고개를 조아렸으나, 훗날 그날 밤의 그 한마디가 방씨세가 전체를 뒤흔들 씨앗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겨울밤의 어둠 속에서, 관사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하나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