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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윤은 벽장에서 나와 서준의 옆에 앉았다. 팔의 상처는 아직 아팠지만,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상처 자리가 옷깃에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다. 서윤은 그 통증을 참으며 오빠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손끝에 남은 온기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한서린은 방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끝을 가볍게 움직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었다 펴는 동작이 마치 처음 손이라는 것을 가져본 사람 같았다. 손목을 돌려보고, 손바닥을 펼쳐 빛에 비춰보고, 다시 주먹을 쥐어보았다. "몸이, 낯설군." 그 말에 서준이 물었다. "낯설다는 게 무슨 뜻이야." "몸의 나이가, 내가 알던 나이가 아니다." 한서린은 그렇게만 말하고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서준은 그 말을 곱씹었다. 소환 당시 시스템이 보여준 형상들, 점과 선과 물결과 탑. 그 중 어떤 것이 이 몸의 나이를 결정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점은 시작이었다. 선은 이어짐이었다. 물결은 흔들림이었다. 탑은 쌓아 올린 것이었다. 서준은 그 네 가지 문양이 눈앞에서 회전하던 순간을 기억했다. 손끝이 저릿했던 것도, 귓속에서 웅— 하는 낮은 울림이 지나갔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 울림이 지나간 자리에 한서린이 서 있었다. 다만 눈앞의 한서린은, 겉으로 보면 서윤보다 어릴 것 같은 체구였다. 하지만 말투와 눈빛에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서준은 그 부조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린아이의 몸에 실려 있는 것은, 분명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오래 무언가를 견뎌온 사람의 눈동자였다. 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내가 부른 사람이야." 서준의 대답에 서윤의 눈이 커졌다. "부른 사람? 마법이야?" "그런 것 같아." 한서린이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환은 마법이 아니다. 천체가 매개한 계약이다." 그 말투가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오래 반복해서 설명한 말을 그대로 읊는 듯한 어조였다. 서준은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져 물을 여유가 없었다. "계약이라면, 대가가 있는 거 아니야." 서준이 물었다. 질문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에도, 스스로 그 질문을 왜 지금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이 소녀를 얼마나 믿어도 되는지, 그 기준이 필요했다. 한서린은 잠시 서준을 바라보았다. "대가는, 나중에 정해진다. 지금은 묻지 마라." 그 대답은 위협도 아니었고 회피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투였다. 서준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캐물어봐야 나올 답이 없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복도 아래층에서, 아직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친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 그리고 뒤이어 여러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섞여 들렸다. 그 소리들 사이로, 낮게 깔리는 목소리 하나가 섞여 있었다. 지시를 내리는 듯한 어조였다. 서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상황을 이끌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서린이 창문 쪽으로 다가가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넷이 모여 있다. 다섯이었던 것 하나가 도망쳤으니." "싸울 수 있어?" 서준의 물음에 한서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서준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몇 초에 불과했겠지만, 그 몇 초 동안 서준의 심장은 몇 번이나 뛰었다. "이 몸은,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그 대답이 서준을 다시 불안하게 했다. 아까 하급 남자를 밀어낸 힘은 분명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린 자신도 자신의 힘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모른다는 게, 못 싸운다는 뜻이야?" "아니다. 힘은 있다. 다만 이 몸에 맞는 만큼인지, 그 이상인지, 아직 시험해보지 않았다." 서준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이해했다. 한서린이 두려워하는 것은 싸움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의 힘이 이 낯선 몸을 감당할 수 있는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서준은 방구석에 놓인 부러진 나뭇가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무기가 될지는 몰라도, 손에 뭔가라도 쥐고 있어야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 손바닥에 닿는 나무의 거친 감촉. 물기 없이 말라 있는 표면. 그 단단함이 손끝을 통해 팔로, 어깨로 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서준은 자신이 완전히 무력하지는 않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었다. "아래층에, 아버지가 계셔." 서준이 말했다. "다치신 채로." 한서린이 서준을 돌아보았다. "그 사람을 지키고 싶은가." "당연하지." "그럼 지켜라. 나는 그것을 돕겠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서준은 그 말에서, 이 소녀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돕겠다, 라는 말. 명령을 받는 존재의 말투가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자의 말투였다. 서준은 그 차이를 분명히 느꼈다. 서윤이 서준의 손을 잡았다. "오빠, 나도 갈래." "안 돼. 너는 여기 있어." "하지만." "부탁이야." 서준의 목소리에 서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서준의 손바닥에도 전해졌다. 서준은 그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 나서야 놓았다. 서준은 서윤을 다시 벽장 근처로 이끌었다. "소리가 나면 숨어. 알겠지." "알겠어." "문 잘 닫고. 안에서 절대 소리 내지 말고." "응."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마." 서준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서윤이 지겨워할 만큼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오빠의 말을 새기듯 들었다.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신뢰가 있었다. 서준이 무엇을 하든, 오빠가 하는 일이라면 믿겠다는 눈빛이었다. 그 신뢰가 서준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자신은 이 아이의 진짜 오빠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낯선 존재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신을 오빠라 부르고 있었다. 원래의 오빠는 어디로 갔을까. 그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서준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그것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지켜야 한다. 그 생각이 다시 가슴을 채웠다. 이번엔 두려움보다 그 생각이 더 컸다. 한서린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가자." 서준은 나뭇가지를 쥐고 그 뒤를 따랐다. 문틀을 넘어서는 순간, 복도의 공기가 확연히 달랐다. 방 안의 공기는 종이와 먼지 냄새였다. 복도의 공기는 습기와, 그 밑에 깔린 무언가 탄 듯한 냄새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한서린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가벼웠다. 서준은 그 걸음걸이를 보며, 이 소녀가 겉모습과는 다른 존재라는 확신을 다시 가졌다. 계단 하나하나를 밟을 때마다 서준의 발밑에서 나무가 삐걱거렸다. 그런데 한서린이 밟는 계단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같은 나무, 같은 무게일 텐데도 소리는 오직 서준의 발밑에서만 울렸다. 계단 끝에서, 거실이 보였다. 강철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 아까는 없던 발자국이 마룻바닥에 새로 찍혀 있었다. 발자국은 젖어 있었다. 밖에서 들어온 자의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의 방향은 강철웅의 몸 쪽에서 시작해 창문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 곁을 지나간 흔적이었다. 서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 그가 뛰어가려는 순간, 한서린이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기다려." "왜." "저 창문 밖, 그림자가 움직였다." 서준은 그 말에 창밖을 보았다. 어둠 속, 마당의 그림자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의 형체였다. 그 형체는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조금씩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사냥감을 앞에 둔 자의 걸음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다가오는 걸음이었다. 한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넷이 아니라, 다섯이었나." 그 말과 동시에, 창문 유리가 요란하게 깨지며 무언가가 거실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몇 조각이 서준의 뺨 가까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깨진 창을 통해 거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아든 것은 돌덩이였다. 벽에 부딪혀 튕겨나가, 거실 바닥을 굴렀다. 그저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깨진 창문 너머로, 붉은 사자 문양의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하나둘 마당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갑옷의 표면이 달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났다. 각자의 손에는 저마다 다른 무기가 들려 있었다. 검을 든 자. 도끼를 든 자. 아무런 무기 없이 맨손으로 다가오는 자도 있었다. 그 맨손의 사내가 오히려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 수는, 처음 보았던 넷보다 훨씬 많았다. 다섯, 여섯, 일곱. 서준은 속으로 그 수를 헤아리다가 그만두었다. 세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그림자들이 계속 마당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서린이 서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눈빛에서, 처음으로 옅은 긴장이 스쳤다. 그 긴장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이 몸이, 이 낯선 몸이 저 숫자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재는 눈빛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서준의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깨진 창틀 너머로, 붉은 사자 문양들이 하나씩 더 늘어나고 있었다. 마당은 이제 완전히 그들로 뒤덮여 있었고, 거실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 같은 것이 섞여 들어왔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서준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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