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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어둠이었다. 먼저 온 것은 냄새였다. 피 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탄 냄새. 이서준은 눈을 뜨기도 전에 코가 먼저 깨어났다. 쇠 냄새였다. 뭔가 오래 끓인 냄새이기도 했다. 그 위에 얹힌 것은 나무가 타는 냄새였다. 세 가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짓눌렀다. 손끝이 차가웠다. 바닥은 나무였다. 오래된 마룻바닥의 결이 등에 그대로 배겨왔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자 먼지와 함께 미세한 진동이 손끝에 닿았다. 저 멀리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의 잔향 같은 것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서까래가 노출된 목조 천장, 낮게 걸린 등불 하나, 그 등불조차 반쯤은 꺼져 있었다. 대학 강의실도 아니었고, 자취방 천장도 아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천장의 나뭇결이 조금씩 초점을 맞춰갔다. 옹이 자국이 있었다. 오래된 집이었다. 적어도 수십 년은 된 목조 건물이라는 것을, 서준은 이상하게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기억은 두 겹으로 겹쳐 있었다. 한 겹은 익숙했다. 서울의 원룸, 밤새 켜둔 모니터, 편의점 삼각김밥, 다음 학기 등록금 걱정. 새벽 세 시까지 붙잡고 있던 과제, 알람 소리, 지하철 환승 안내 방송. 그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심지어 원룸 벽지의 얼룩까지 떠올랐다. 창문 너머로 들리던 오토바이 소리. 편의점 알바생의 무심한 눈빛까지도. 다른 한 겹은 낯설었다. 이서준이라는 이름. 열여섯 해를 살아온 몸. 이 저택. 이 냄새. 이 냄새와 함께 딸려오는 수십 개의 얼굴들, 이름들, 감촉들. 그런데 그 낯선 기억 쪽이 더 무겁게 몸에 붙어 있었다. 마치 오래 입은 옷처럼, 낯선 기억이 이 몸에 더 잘 맞았다. 서준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두 겹의 기억이 겹쳐질 때마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정리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팔이 후들거렸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우는 데만도 힘이 들었다. 다리에도 힘이 없었다. 원래 몸이 약했던 건지, 방금 무슨 일을 당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팔뚝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그을려 있었다. 하지만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순간, 가슴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웅— 소리는 아니었다. 소리처럼 느껴지는 진동이었다. 심장 아래, 명치 안쪽, 뭔가가 눈을 뜨는 감각이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감이었다. 마치 몸 안에 숨어있던 두 번째 심장이 처음으로 박동을 시작한 것 같았다. 점. 선. 물결. 탑. 네 개의 형상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실제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보인다고 느꼈을 뿐이다. 서준은 숨을 멈췄다. 형상들은 순서 없이, 그러나 뚜렷하게 지나갔다. 점 하나가 찍히고, 선 하나가 그어지고, 물결이 일렁이고, 탑이 솟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전체 과정은 채 한 호흡도 되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속에서 막 깨어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그 감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방문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경첩 한쪽이 뜯겨 나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나무 문짝에는 무언가에 긁힌 자국이 세 줄, 나란히 나 있었다. 짐승의 발톱 같기도 했고, 무기의 자국 같기도 했다. 서준은 그 문을 밀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어두웠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액자 유리가 깨져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등불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복도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였다. 갑옷의 어깨판이 움푹 찌그러져 있었다. 백웅용병단의 문양이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다. 방패 위에 곰 한 마리. 서준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낯선 기억이 다시 흘러들었다. 백웅용병단. 아버지가 세운 단체. 이 저택을 지키는 사람들. 서준은 무릎을 꿇고 남자의 목에 손을 대었다. 맥이 뛰고 있었다. 약하지만 뛰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그 미약한 박동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안도할 틈은 없었다. 복도 끝, 계단 아래에도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떨렸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계단 아래 쓰러진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갑옷 대신 가벼운 경장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 매인 단검이 반쯤 뽑혀 있는 채였다. 무언가에 맞서려다 실패한 흔적이었다. 서준은 그 여자의 목에도 손을 대보았다. 맥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거실이 보였다. 원래는 넓고 밝았을 공간이었다. 지금은 가구가 뒤집혀 있었고, 커튼 한쪽이 불에 그슬려 있었다. 테이블 하나는 완전히 부서져 다리 한쪽만 남아 있었다. 책장에서 떨어진 책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중 몇 권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가운데, 큰 소파 옆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중년의 남자였다. 어깨가 넓고 팔뚝이 두꺼웠다. 백웅용병단의 단장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 왼쪽 옆구리가 크게 갈라져 있었고, 그 밑으로 피가 배어 나와 바닥에 검붉게 굳어 있었다. 갑옷 표면에는 여러 개의 흠집이 나 있었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버텨낸 흔적이었다. 서준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흘러들었다. 강철웅. 아버지. 백웅용병단의 단장. 어릴 때 목말을 태워주던 손. 훈련장에서 큰 소리로 웃던 얼굴. 밤늦게 돌아와 조용히 방문을 열어보던 발소리. 낯선 이름이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몸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먼저 그 이름에 반응했다. "아버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서준은 스스로도 놀랐다. 낯선 몸이 낯선 언어로 낯선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진짜 감정이었다. 머리는 여전히 서울의 기억을 붙잡고 있는데, 몸은 이미 이 남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울고 있었다. 강철웅은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은 얕고 불규칙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서준은 상처를 살폈다. 옆구리 상처는 깊었다. 갑옷 틈으로 살이 갈라진 것이 보였다. 지혈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학 시절 응급처치 교육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 사람의 피를 눈앞에서 본 적은 없었다. 손을 뻗었다가 다시 움츠렸다. 상처에 손을 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잘못일 것 같았다. 서준은 이를 악물고 근처에 떨어진 천 조각을 주워 상처 위에 눌러 덮었다. 손바닥에 뜨끈한 것이 스며들었다. 피였다. 아직 따뜻했다. 그것이 오히려 위태로운 신호처럼 느껴졌다. 거실 안쪽, 부서진 창문 너머로 바깥이 보였다. 마당에도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셋, 넷. 백웅용병단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몇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낯선 무기 하나가 땅에 박혀 있었다. 백웅의 문양이 아니었다. 붉은 사자 머리 문양이었다. 혈사자.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몸이 반응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낯선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은 공포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 문양을 본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서준은 창문 밖을 다시 살폈다. 마당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바람에 커튼 자락만 흔들렸다. 마당 저편, 부서진 정문 너머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적이 아직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는 몸을 낮췄다. 숨을 죽이고 다시 거실을 살폈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하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서준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이런 참극이 벌어진 곳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정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도리어 불안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였다.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서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몸이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서윤. 그 이름과 함께 또 다른 기억이 밀려들었다. 작은 손을 잡고 걷던 뒷마당. 함께 웃던 저녁 식탁. 오빠, 라고 부르며 뒤를 따라오던 발소리. 낯선 기억이었지만, 그 안의 온기는 진짜였다. 서준은 다시 강철웅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손바닥에 눌러 덮은 천 조각 아래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을 두고 가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무엇이라도 더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위층의 신음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약해진 소리였다. 서준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리는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강철웅의 숨소리가 아주 짧게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 소리가 서준의 등을 붙잡았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금은 둘 다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몸은 선택을 내린 뒤였다. 서준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칸, 한 칸. 나무 계단이 발밑에서 낮게 삐걱거렸다. 그 소리마저 크게 느껴졌다. 몸속의 그 울림이 다시 느껴졌다. 웅—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울렸다. 마치 무언가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계단 위, 어둠 속에서 또 한 번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서준은 그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심장은 이미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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