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남자의 손이 벽장을 향해 뻗었다.
느렸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 손끝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 짧은 순간이 서준에게는 한없이 길게 늘어졌다. 손가락 마디마디의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였다. 갑옷 위에 얹힌 그 손은 크고 거칠었다. 오랫동안 무기를 쥐어온 손이었다.
서준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그 앞을 막아섰다. 벽장과 남자의 손 사이, 자신의 몸을 밀어넣었다. 계획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그저 저 손이 벽장에 닿는 순간, 서윤이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은 이미 차갑게 얼어 있었다.
"비켜라."
남자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억양조차 없었다. 마치 길을 막고 선 돌멩이를 치우라는 말투였다.
손이 서준의 어깨를 잡았다. 억센 손아귀였다. 그대로 밀어내려는 힘이 어깨뼈를 짓눌렀다. 서준의 발이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긁었다.
그 순간, 서준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웅——
소리가 아니었다. 진동이었다. 방 전체가 그 진동에 반응하는 듯했다. 벽에 걸린 등불이 흔들렸고,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창문 유리가 낮게 웅웅거렸다.
서준은 그 떨림을 발바닥으로 먼저 느꼈다. 그리고 가슴으로, 마지막엔 눈으로.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 안에서, 형상들이 나타났다.
점. 선. 물결. 탑.
이전에도 본 적 있는 형상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눈앞에 하나씩 맺혔다. 점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 옆으로 선이 그려졌다. 물결이 그 사이를 흐르듯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탑이 우뚝 섰다. 네 개의 형상은 곧 서로 얽히기 시작했다. 실이 감기듯, 형상들이 겹치고 휘어지며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 원 안으로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백, 수천 개의 빛나는 점들이었다. 서준은 그 광경 속에 잠긴 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잊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남자의 손아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무언가를 부르고 있었다. 언어는 알 수 없었다. 모음도 자음도 구별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울림은 분명히, 어떤 형태를 향한 부름이었다. 서준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그 소리는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소리처럼 익숙했다.
방 안이 순간적으로 빛에 잠겼다.
시야를 가릴 정도의 빛이었다. 갑옷 남자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급 남자는 곡도를 놓칠 뻔하며 눈을 가리고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이건!"
빛의 중심에서, 사람의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정말 작은 아이의 형상 같았다. 윤곽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그 형체는 점차 또렷해졌다. 어깨가 생기고, 팔이 생기고, 마지막으로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빛이 완전히 걷혔을 때, 그 자리에는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였다. 눈은 짙은 남색이었고, 그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헐렁한 회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그 옷을 입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발은 맨발이었고, 발가락 끝이 바닥의 냉기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방 안을 한 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부서진 창문, 흩어진 유리 조각, 벽에 남은 흠집들. 그 시선은 마치 처음 보는 세계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준을 보았다.
그 눈이 서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서준은 숨을 멈췄다.
무언가가 온몸을 관통하는 감각이었다. 낯선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각이 아니었다. 오래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다시 찾은 듯한,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어딘가에서 이 눈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소녀도 같은 것을 느낀 듯했다.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끝이 가슴 위를 눌렀다.
"……계약자."
소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나이에 비해 차분했다.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산 사람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갑옷 남자가 그 광경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발이 유리 조각을 밟았지만, 그 소리조차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소환이라니."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긴장이 섞였다. 지금까지 서준과 서윤을 다룰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이 어린놈이, 진짜로."
남자의 시선이 소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그 존재를 가늠하려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소녀는 방 안의 남자들을 훑어보았다. 무기를 든 손, 갑옷의 이음새, 자세와 체중의 분배까지. 그리고 시선이 곡도를 든 하급 남자에게 멈췄다.
"이들이 위협인가."
소녀가 서준에게 물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물음 안에는, 이미 답을 정한 듯한 확신이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확인만 하려는 태도였다.
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여전히 조여 있었다. 방금까지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외치던 그 감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소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짧은 동작이었다. 마치 별다른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필요 없다는 듯했다.
하급 남자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곡도를 들어올리며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고, 칼날이 등불의 빛을 받아 번뜩였다.
"죽어!"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피하지도, 자세를 낮추지도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손목을 살짝 꺾는 것 같은, 아주 작은 동작이었다.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서준은 그 변화를 피부로 먼저 느꼈다. 마치 방 안의 기압이 순식간에 바뀐 것 같았다. 귀 안쪽이 먹먹해졌다.
남자의 곡도가 소녀의 목 앞, 채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갔다. 그 순간 남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남자는 마치 거대한 손에 붙잡힌 듯 뒤로 날아갔다.
남자는 그대로 복도 벽에 부딪혔다. 나무 벽이 그대로 움푹 꺼졌다. 벽 틈에서 나무 파편이 튀어올랐다. 남자는 벽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진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숨소리만 거칠게 이어졌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등불의 불꽃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웠다.
갑옷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쓰러진 부하와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준을 보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저건, LV0 수준이 아니다."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그 말을 남긴 채, 남자는 몸을 돌려 복도로 뛰쳐나갔다. 발소리가 급하게 멀어졌다. 도망이었다.
소녀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쫓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다시 서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름."
소녀가 짧게 물었다. 억양이 거의 없는 질문이었다.
"이서준."
서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서린."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 정도였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미미했지만, 분명 표정의 변화였다.
"이제부터 내가 네 사역마인가."
서준은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앞에 낯선 소녀가 서서 자신을 계약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몸속의 울림은 잦아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낮게 맥동하고 있었다.
"사역마……"
서준이 그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부서진 창문, 쓰러진 남자, 서준의 떨리는 어깨.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벽장에 닿았다.
벽장 문이 살짝 열렸다.
서윤이 그 안에서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좁은 틈으로 새어드는 빛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시선은 방 안의 상황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서윤의 시선이 한서린에게 닿았다. 낯선 소녀의 등장에 놀란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에, 놀라움과 함께 낯선 종류의 안도가 스쳤다. 위험이 사라졌다는 것을, 몸으로 먼저 알아챈 듯했다.
"오빠."
서윤이 작게 불렀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 한 마디에, 서준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유리 조각이 손바닥을 살짝 긁었지만, 그 통증조차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서린은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시선만은 서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복도 저편에서, 도망친 남자의 발소리가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것이 들렸다. 급하게, 아무렇게나 내딛는 발소리였다. 그 소리는 곧 계단 아래에서 다른 발소리와 뒤섞였다.
그 발소리는, 곧 더 많은 발소리로 이어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