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별채의 하루는 겉보기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류아는 여전히 새벽마다 죽을 끓였고, 나는 여전히 마당에서 목검을, 이제는 백련검을 휘둘렀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마당의 흙은 아직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뻗어 올라오는 미세한 진동이 있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그 떨림은, 마치 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이건... 단순한 훈련이 아니야.)
나는 그 감각을 곱씹으며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베고, 물러서고, 다시 베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부엌 쪽에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태호 님, 오늘은 시장에 안 나가셔도 될 것 같아요."
류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부엌문을 열고 나왔다.
"어제 받은 삯이 좀 많았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감춰진 피로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손목의 굳은살, 눈 밑의 그늘.
밥그릇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많이 힘들었지."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류아는 손사래를 치며 부뚜막으로 돌아갔다.
(이 아이는 나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버리고 있는 걸까.)
나는 검을 내려놓고 마루에 앉았다.
죽 한 그릇을 받아들었을 때, 김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
짧은 대답이었지만, 류아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웃었다.
식사 후, 나는 가문 본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좁은 길에는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고 있었다.
본채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10년 만에 다시 걷는 길이었다.
서류 정리를 돕는 하급 시종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태호 도련님이 여긴 왜..."
그의 눈빛에는 경계와 의아함이 뒤섞여 있었다.
"본채 서고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그, 서고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관리인 허락은 받았어."
거짓말이었다.
시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길을 비켜주었다.
(다행이야. 오래 붙잡히면 곤란했을 텐데.)
서고는 가문의 오래된 문서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10년간 나는 그곳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아무도 폐인에게 서고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관리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렸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낡은 서가마다 두꺼운 문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서가의 이름표를 하나씩 확인했다.
'무인 서열', '가문 인사록', '임무 기록'.
손끝이 문서를 훑을 때마다 종이 특유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낡은 문서들 사이에서 나는 강씨 가문의 서열 체계에 관한 기록을 훑었다.
무인 서열은 1급부터 9급까지로 나뉘어 있었다.
1급에 가까울수록 강자였고, 진태준은 7급.
(생각보다 낮은데... 그런데도 그 정도 힘을 가졌다는 건가.)
여명성 3대 가문—강씨, 진씨,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이 낡은 먹으로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조씨.
조설아의 가문이었다.
(조씨 가문이라... 그녀도 이 서열 체계 안에 있는 걸까.)
나는 문서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강씨 가문은... 왜 나를 버렸을까.)
그 질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10년 전, 나는 폐인이 되었다.
그리고 가문은 나를 별채로 밀어냈다.
이유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한 장의 문서에 '강천'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집어 들었다.
먹으로 쓴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그 문서에는 '역천개명지기 탐사 임무, 실종 처리'라는 짧은 문구만 있었다.
실종.
사망이 아니라 실종.
(...가문에서는 사망이 아니라 실종으로 기록해 놓았다고?)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나는 문서를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류아에게, 그리고 가문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들어왔다.
아버지는 임무 중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만 이 문서에는 명확히 '실종'이라 적혀 있었다.
사망과 실종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누군가 거짓을 퍼뜨린 거야. 그렇다면...)
그 밑에는 어머니의 이름도 함께 적혀 있었다.
실종 사유는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 빈칸이, 오히려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누군가 이걸 알면서도 숨긴 거야.)
손끝이 문서 위에서 멈춘 채 떨렸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어머니의 실종에도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확신.
그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나를 짓눌렀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느리지만 분명한 발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문서를 원래 자리에 꽂아넣고 서고를 빠져나왔다.
(들키면 곤란해. 지금은 아니야.)
숨을 죽인 채 서고 문을 나서자, 저 멀리 관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몸을 낮추고 반대편 골목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별채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나는 방금 본 문서의 문구를 곱씹었다.
바람이 불어 담벼락 위 나뭇잎이 스산하게 흔들렸다.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소리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신경을 긁는 낯선 파문처럼 느껴졌다.
실종. 그리고 은폐.
아버지가 정말 죽은 것인지, 어딘가에서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실종에도 무언가 가문이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내야 해.)
걸음을 옮길수록 결심이 단단해졌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별채라는 좁은 세계 너머에 훨씬 더 큰 진실이 숨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별채에 도착하자 류아가 마당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태호 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한참 안 오셔서 걱정했어요."
"...잠깐 산책."
나는 짧게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류아는 뭔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방 안, 벽에 세워둔 백련검을 다시 바라봤다.
저녁 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며 검신 위로 붉은 기운을 얹었다.
검신은 평범해 보였지만, 손을 얹으면 여전히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 검이... 그리고 내 안의 그 힘이. 아버지가 남긴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해.)
나는 검을 쥔 채 오래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서 오늘 본 문서의 글자들이 계속 맴돌았다.
'실종 처리.'
그 짧은 문구가 마치 못처럼 박혀 빠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다시 그 거대한 나무를 봤다.
하늘을 가릴 듯 뻗은 가지, 대지를 움켜쥔 뿌리.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나뭇잎들이 스스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 한 남자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 실루엣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넓은 어깨, 곧게 뻗은 등.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형상이었다.
"...아버지?"
내 목소리가 꿈속에서 흩어졌다.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들어 나무 뒤편, 더 깊은 어둠을 가리켰다.
그 어둠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말인지, 아니면 그저 바람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개명지기를..."
목소리는 짧게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낮고, 갈라진, 사람의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그림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 거기 있는 거예요?)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방 안은 어두웠고, 창밖에서는 벌레 소리만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배어 있었다.
(방금 그건... 꿈이었나. 아니면.)
나는 벽에 세워둔 백련검을 바라봤다.
검신이 아주 희미하게,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히 봤다.
두 눈으로 똑똑히.
방 안은 다시 어둠으로 가득 찼고, 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