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적이 흘렀다.
골목 안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진태준의 검은 여전히 내 목 바로 앞에서 무언가에 막혀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골목 어귀를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귓가에 감돌았다.
그 바람마저도 지금 이 순간엔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별채 방향에서 하얀 빛줄기가 골목을 향해 곧게 뻗어왔다.
스으윽.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빛은 허공을 가르며 다가왔다.
류아가 숨을 삼켰다.
"저건... 태호 님 방에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평소 침착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빛이 닿은 곳에서 검 한 자루가 형체를 갖췄다.
백련검.
하급 무기라 불리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
손잡이는 낡고 갈라져 있었고 검신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녹슨 부분과 오래된 실금들이 달빛 아래 선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그 검은 스스로 허공에 떠올라 내 손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검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방 한구석 낡은 상자 속에 처박혀 있던 검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검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허공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손잡이를 쥐는 순간, 팔뚝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그 기운은 익숙했다. 며칠 전부터 몸 안에서 꿈틀거리던 그 낯선 맥동과 정확히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쿠웅.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낮게 울렸다.
심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자리였다.
진태준이 뒤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나는 백련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이 달빛 아래 은은한 백색으로 빛났다.
낡고 갈라졌던 손잡이마저 지금은 낯설게 매끈한 감촉으로 손에 감겨왔다.
손목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이 몸이 아니라 검이 나를 이끄는 것처럼.
스릉.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진태준의 검이 튕겨 나갔다.
쨍.
날카로운 금속음이 골목을 울렸다.
그 소리는 좁은 담벼락 사이를 타고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어딘가에서 놀란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진태준이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돼. 폐인 따위가 이런 힘을..."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균열이 섞여 있었다.
(이건 내 힘이 아니야. 이 검이... 아니, 이 검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손끝에서부터 팔뚝, 어깨까지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
그 기운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이제야 눈을 뜨려는 몸짓 같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짧은 잔상이 스쳤다.
푸르른 나뭇잎이 하늘을 가득 채운 거대한 나무.
그 뿌리가 대지 깊숙이 내려앉아 있는 광경.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줄기와, 그 아래 서 있는 알 수 없는 그림자.
낯선, 그러나 거대한 존재감.
(신단수... 이건 뭐지.)
그 잔상은 짧았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잔상이 남긴 감각만은 선명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이제야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느낌.
손바닥에 닿은 검의 온기가 그 감각을 더 깊게 새겼다.
진태준이 검을 고쳐 잡았다.
"어디서 이런 걸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그는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발끝이 바닥의 자갈을 밀어내며 자그락 소리를 냈다.
"이 일, 조설아 아가씨한테 그대로 전할 거다. 폐인 강태호가 요물을 손에 넣었다고."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골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자갈을 밟는 소리, 담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침묵.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백련검을 든 손을 내렸다.
검은 방금 전의 서늘한 빛을 잃고 다시 평범한 낡은 검으로 돌아와 있었다.
손잡이의 갈라진 틈도, 검신의 녹도 그대로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은 원래의 낡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류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태호 님... 괜찮으세요?"
그녀의 손이 내 어깨 근처에서 잠시 머물다가,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괜찮아."
나는 검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뭔가 거대한 것과 마주한 뒤의 여운이었다.
류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내 옆에 조용히 서서, 내가 검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함께 바라봐 주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버지... 이 검에 뭘 남긴 겁니까.)
3년 전, 아버지 강천은 '역천개명지기를 찾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 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외출했다가 그대로 실종됐다.
나는, 아니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안쪽이 아려왔다.
이것은 정민준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 몸에 남아 있던, 강태호 본연의 상처였다.
두 개의 영혼이 뒤섞여 있는 지금, 그 슬픔조차 온전히 내 것이 되어 있었다.
어린 강태호가 홀로 방 안에서 떨던 밤들이 떠올랐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문 앞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귀를 기울였을까.
그 기억들은 내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선명하게 가슴을 눌렀다.
(누군가 나를 구해줄 존재가 있었다면...)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쳤다.
어린 시절, 낙인찍힌 채 홀로 버려졌을 때.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다면 어땠을까.
바람이 다시 골목을 스쳤다.
그 바람은 아까와 같은 결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차갑지만은 않은, 어딘가 온기가 섞인 바람이었다.
류아가 내 곁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살짝 기댔다.
그녀의 체온이 옷깃 너머로 은은하게 전해졌다.
"태호 님은 혼자가 아니에요."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녀의 어깨가 닿아 있는 자리를 느끼고 있었다.
말보다 그 온기가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백련검을 품에 안았다.
검신에서는 아직도 아주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이 검 안에, 아버지의 마지막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검을 품에 안은 채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이 몸에 남은 기억 속에서도 그 얼굴은 흐릿했다.
다만 낮고 다정했던 목소리의 잔영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날 밤, 골목의 정적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달빛은 여전히 골목 바닥을 옅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 몸 안에는 단순한 폐인의 껍데기가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확신과 동시에, 낯선 불안 하나가 가슴 한구석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진태준이 남긴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조설아 아가씨한테 그대로 전할 거다.
그 말이 무엇을 불러올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