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결과라는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나는 다음 날 아침에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소자가 그날 밤 흡수한 감각을 통해, 담장 너머 회풍문 무리의 움직임이 좀 더 소상하게 들려왔다. 텔레파시로 오는 정보는 정확한 말이 아니라 감정의 형태였다. 두려움, 조급함,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분노. 세 가지가 뒤섞여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이불 속에서 눈을 뜬 채 그 감정의 잔여를 곱씹었다. 두려움은 누구의 것인가. 조급함은 어디서 오는가. 분노는 누구를 향하는가. 감정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알아내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그 객사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문소아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위험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따라나선다면 걱정이 하나 더 늘 뿐이었고, 걱정은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혼자 걷는 길이 더 가벼웠다.
객사 뒤편으로 돌아드는 길, 담을 따라 늘어선 회화나무 그늘 아래 몸을 붙였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얼굴에 얼룩처럼 떨어졌다. 숨을 낮추고 발끝으로 걸었다. 이런 걸음이 익숙해진다는 게 이 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자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런 감상은 지금 사치였다.
객사 뒤뜰에서 유표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앞에는 마른 체형의 노인이 서 있었다. 독비(毒鼻) 노인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회풍문주 휘하에서 일선의 일들을 관리하는 자였다. 키는 작았지만 등이 굽지 않았고,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검을 오래 쥔 손이 아니라 사람을 오래 다뤄본 손이었다.
"저 어린놈 하나 처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독비 노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채찍처럼 날카로웠다. "열다섯짜리 병약한 놈 하나 못 잡아서 이 지경이냐."
사독이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주변의 눈이 너무 많습니다. 사매라는 여자아이가 붙어 있고, 약당의 선유하도……"
"핑계는 필요 없다." 독비 노인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 "낙하문은 사흘 안에 무너져야 한다. 그게 위에서 내려온 뜻이야. 그 어린 것 하나 남겨두고 문파가 되살아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네가 진다."
사흘. 그 숫자가 귀에 박혔다. 손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가, 곧바로 다잡았다. 숫자를 알았다는 건 유리한 일이었다. 시한이 없는 위협보다 시한이 있는 위협이 다루기 쉽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보다, 사흘 뒤에 떨어질 칼이 낫다.
사독의 등이 눈에 띄게 굳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함께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려 애쓰는 기색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십시오. 이번엔 확실히……"
"확실히." 독비 노인이 그 말을 되받아 씹었다.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게 몇 번째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독비 노인이 몸을 돌려 걸어가는 소리, 발끝이 자갈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멀어졌다. 사독은 한동안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저 정도의 압박이라면, 이제 저들은 탐색을 그만두고 실행으로 옮길 것이다. 탐색에는 시간이 든다. 실행은 순간이다. 그 경계를 넘는 순간을 놓치면 늦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정보는 충분했다. 회풍문의 목표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낙하문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 그 첫 표적은 나였다.
두려움과 행동은 별개다. 나는 그 문장을 속으로 되새겼다. 지금 두려워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필요한 건 판을 다시 짜는 일이었다.
걸어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남은 시간을 나눠보았다. 사흘. 그중 첫날은 이미 반쯤 지나 있었다. 남은 시간 안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소아를 지킬 방도, 낙하문의 문도들을 모을 방도, 그리고 사독이라는 자를 역으로 이용할 방도. 세 가지 축을 세우고, 그 위에 순서를 얹었다. 지금 당장 손댈 수 있는 건 첫 번째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소자에게 물었다. "저들이 언제 움직일 것 같으냐." 대답은 없었다. 소자는 정확한 시점을 예측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위험의 크기만을 감정으로 전해왔다. 그 감정은 무거웠다. 마치 물에 젖은 솜을 얹어놓은 것처럼, 가슴 한복판이 계속 눌리는 느낌이었다.
아침이 밝자 문소아가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오라버니, 안색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밤새 잠을 설친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은 모양이었다. 눈 밑이 거뭇해진 걸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별일 아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다만 준비는 시켜두어야 했다. 모르는 채로 다치는 것보다, 이유는 몰라도 대비만 되어 있는 쪽이 나았다.
"소아야. 요 며칠은 밤에 방을 비우지 마라." 나는 말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유를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내 말투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만 끄덕였다.
"오라버니도요." 그녀가 낮게 덧붙였다.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어젯밤에 그 약속을 어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낮이 되자 마을에 낯선 소문이 돌았다. 회풍문이 이번 무술대회에 새로운 후원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낙하문이 여러 해 이어오던 행사를, 회풍문의 이름으로 갈아치우려는 수작이었다. 상금의 액수가 예년의 몇 배라는 말이 붙어 다녔고, 그 액수를 입에 담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시장 어귀에서 노포 주인이 옆 가게 주인에게 소리 낮춰 말하는 걸 들었다. "회풍문 돈이 좋긴 하지, 근데 낙하문 은혜를 그렇게 쉽게 잊어도 되는 건가." 그 말에 옆 가게 주인은 어깨만 으쓱였다. 은혜는 배부를 때나 기억하는 것이지, 굶주릴 때는 잊히는 법이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갈렸다. 낙하문에 남은 정을 지키려는 이들과, 강자의 편에 서려는 이들로. 어느 쪽이 많은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저울이 조금씩 회풍문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그 균열을 눈에 담아두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언젠가 저 틈을 벌려 쓸 날이 올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갈린 자리에는 늘 씨를 심을 자리가 남는다.
그날 오후, 약당 앞에서 선유하와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항상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던 소매 끝이 살짝 구겨져 있었고, 손끝에는 약재 가루 대신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강 공자,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목소리에 조심스러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선유하는 필요 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조심스러움 뒤에 감춰진 게 무엇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짐작조차 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