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실 저 안 약합니다

1화

검이 심장을 갈랐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비었다. 절정에 이른 무인이라 해도 죽음 앞에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나는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평생을 갈고닦은 검로도, 삼십 년을 쌓아온 내공도, 심장을 뚫고 들어온 서늘한 쇳덩이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통이 없었다. 살이 갈리고 뼈가 부서지는 그 순간에도, 몸은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저 시야가 좁아지고, 소리가 멀어지고, 세상이 한 발짝씩 물러나는 것을 느낌 없이 지켜보았다. 눈앞의 상대가 검을 뽑아내는 것도,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전부 흐릿했다. 죽는 순간에 사람은 인생을 되돌아본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다음 생각을 이어가려 했을 뿐이다. 습관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산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누가 배신했는가. 언제부터였는가. 막을 수 있었는가. 답이 나오기도 전에 생각은 끊겼다. 그리고 어둠이었다. *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다. 낡은 서까래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처음 보는 천장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었다. 둘 다였다. 두 개의 기억이 한 머리 안에서 겹쳐 있었다. 하나는 방금 죽은 자의 기억이었다. 검을 쥐고 산을 넘고, 문파를 세우고, 수백의 적을 베며 절정에 다다랐던 삶. 다른 하나는 이 몸의 기억이었다. 마르고 약한 몸, 낙하문의 말석 제자, 강현이라는 이름. 같은 이름이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이건 이어짐이었다. 전생과 현생이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두 기억을 나란히 놓아보았다. 전생의 나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죽었다. 지금 이 몸은 열다섯 안팎이었다. 기억 속에서 확인한 나이였다. 마흔 해 넘게 쌓아온 삶이 통째로 접혀, 다시 시작되는 삶 안에 끼워진 셈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보았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힘을 넣어보니 반응이 굼떴다. 근육이 형편없이 부실했다. 전생의 감각으로 보자면, 이건 무공을 시작한 지 반년도 안 된 아이의 몸이었다. —몸이 약하다. 판단은 명확했다. 감정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만 확인하면 됐다. 손목을 세워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보았다. 관절이 뻣뻣했다. 전생이었다면 눈 감고도 해낼 수 있는 간단한 동작에서조차, 이 몸은 미묘하게 삐걱거렸다. 근맥이 제대로 트이지 않은 것이다. 기초 중의 기초. 그마저도 부실했다. 의식을 안으로 돌렸다. 단전을 살폈다. 그곳에서 이상한 것이 꿈틀거렸다. 자그마한, 자색의 무언가가 몸을 말고 있었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기운만은 또렷했다. 전기의 냄새가 났다.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전생에서, 나는 이 기운과 세 번 싸웠다. 세 번 모두 목숨을 걸었다. 한 번은 왼팔을 잃을 뻔했고, 두 번째는 문파의 제자 여섯이 그 자리에서 재가 되었다. 세 번째가 가장 지독했다. 그 괴수의 이름이 소자였다. 숙적이 애완동물의 형태로 내 단전에 들어와 있다. 헛웃음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의념을 뻗었다. 『……거기 있느냐.』 반응이 왔다. 작은 몸이 꿈틀, 하고 움직이며 낯선 감각을 되돌려줬다. 말이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반가움. 순수한 반가움이었다. 전생의 그 흉포한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 더 의념을 밀어 넣었다. 이번엔 더 또렷하게. 『나를 아느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온기였다.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것이 돌아온 것을 반기듯, 자그마한 기운이 단전 안에서 몸을 비볐다. 적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얘도 다시 태어난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내게는 아무도 모르는 힘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좁고 허름했다. 벽에 금이 가 있었고, 창호지는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낙하문의 말석 제자가 쓰는 방이라 하기에도 초라했다. 방 한 켠에 놓인 목검은 손잡이가 닳아 반질거렸고, 그 옆의 낡은 서책 몇 권은 겉장이 뜯겨 나가 있었다. 기억이 이어졌다. 낙하문은 한때 이 지역에서 이름 있는 문파였다. 산 아래 세 개 마을을 거느리고, 매년 무술대회를 열어 인근 문파들이 다투어 찾아오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문주였던 청현진인이 세상을 떠난 뒤로 급격히 기울었다. 사부의 죽음. 안개밤이라 불리는 그 밤의 일.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문만 무성했다. 어떤 이는 주화입마라 했고, 어떤 이는 외부의 습격이라 했다. 어느 쪽도 증거가 없었다. 그 이름을 떠올리자 가슴이 조여왔다. 이 몸의 기억 속에서, 청현진인은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손을 잡고 첫 걸음을 가르쳐준 사람. 밤마다 화로 앞에 앉혀놓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 전생의 나는 그런 정을 잘 몰랐다. 지금은 알겠다. 이 몸에 새겨진 감정이, 낯선 물처럼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진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이 삶의 첫 번째 목표였다. 두 번째는 생존이었다. 기억을 헤집으니, 그 이유가 함께 떠올랐다. 회풍문. 이 지역의 신흥 세력이자, 낙하문을 집어삼키려는 자들이었다. 청현진인이 죽은 뒤로 낙하문의 땅과 제자를 하나둘 흡수해온 문파. 몰락한 문파의 마지막 남은 제자 몇을 지워버리는 것쯤 그들에게는 별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지금 이 몸이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인지 온전히 이해했다. 약한 몸, 몰락한 문파, 노리는 적. 세 가지가 겹쳐 있었다. 어느 하나만 있어도 버거운 조건인데, 셋이 동시에 얹혀 있었다. 칼을 뽑는 놈은 읽힌다. 먼저 뽑히면 안 된다. 내가 가진 것은 전생의 지식과, 아무도 모르는 소자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충분하게 만들어야 했다. 방법은 나중에 찾으면 된다. 지금은 판을 읽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 벽에 걸린 낡은 옷가지의 개수, 문틀에 새겨진 흠집까지. 습관이었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든 먼저 구조를 눈에 담아두는 것. 전생에서부터 몸에 새겨진 버릇이었다.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문소아일 것이다. 이 몸의 기억이 그렇게 말해줬다. 사매. 유일하게 이 방에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발소리의 간격이 일정했다. 걱정과 조심스러움이 뒤섞인 걸음걸이. 기억 속에서 그녀는 매일 아침 이 시간에 들러 죽 한 그릇을 놓고 갔다.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눕혔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 약한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성급하게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관찰뿐이었다.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스며든 아침 빛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작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앳된 얼굴, 야무지게 묶은 머리, 손에 든 소반. 문소아였다. "오라버니, 일어나셨어요?" 그 목소리에 담긴 걱정이 진짜였다. 눈가에 옅게 남은 붉은 기운, 며칠 잠을 설친 듯한 낯빛. 이 몸이 얼마나 오래 앓았는지, 그 얼굴만 보아도 짐작이 갔다. 나는 눈을 뜨며 처음으로, 이 낯선 생에서 첫 대사를 뱉었다. "……괜찮다."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 삶에서 내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감춰야 하는지였다. 문소아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소반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이에요. 어젯밤에 또 열이 올라서… 그런데, 오라버니." 말끝이 흐려졌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 망설임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 몸의 기억 어디에도, 지금 이 순간에 해당하는 조각은 없었다. "회풍문에서 사람이 왔어요."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