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회풍문에서 사람이 왔어요."
문소아의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깔렸다.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열다섯 안팎의 몸은 아직 전생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단전에서 소자가 꿈틀거렸다. 반갑다는 신호였다. 나는 잠시 그 온기를 느끼며 숨을 골랐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뻐근하게 당겼다. 이 몸은 아직도 나를 배신한다. 마음은 앞서가는데 몸이 뒤따라오지 못하는 감각. 전생의 나였다면 진작 익숙해졌을 것을, 이번 생에서는 매번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회풍문이라는 이름이 이 안에서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는, 어제 하루 만에 충분히 파악했다. 산 아래 세 마을을 거느리던 낙하문이, 사부가 죽은 뒤 그 세력을 하나둘 빼앗기고 있었다. 소작인들이 세곡을 다른 곳에 바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장터의 상인들이 낙하문의 표식을 슬그머니 떼어냈다는 이야기, 그 모든 소문의 끝에는 언제나 회풍문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다. 회풍문은 그 빈틈을 파고드는 짐승이었다. 굶주린 짐승은 함부로 뛰어들지 않는다. 먼저 냄새를 맡고, 상대가 얼마나 약한지를 가늠한다.
"몇 명이나 왔느냐."
나는 물었다.
"두 명이에요. 선물을 가져왔다는데……"
문소아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눈가에는 며칠 잠을 설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걱정이라는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걸어두는 성격이었다. 저 얼굴로는 도박판에 앉아도 손에 든 패가 다 읽힐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옷깃을 여몄다.
선물. 나는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적이 선물을 들고 온다면, 그것은 탐색이다. 실력을 재고, 약점을 찾고, 저항할 뜻이 있는지를 살피려는 것. 진짜로 도움을 주러 오는 자는 아랫사람 편에 물건만 들려 보내지, 굳이 사람을 두 명이나 붙여 직접 걸음을 시키지 않는다. 걸음 하나에도 목적이 있다.
나는 이불을 밀치고 일어났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근육이라 부를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 정도 움직임에 숨이 흐트러질 일은 없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무릎이 시큰거렸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 나는 약하다. 그리고 그 약함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가장 유용한 방패였다. 약한 척이 아니라 실제로 약한 것이니, 저들이 아무리 눈을 굴려도 거짓을 찾아낼 수 없다. 가장 완벽한 위장은 위장이 아닌 것이다.
소자가 텔레파시로 조그맣게 신호를 보냈다. 경계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손끝으로 단전을 가볍게 눌렀다. 알겠다, 그런 뜻이었다. 소자는 더 말이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괜찮으세요?"
문소아가 물었다. 어젯밤 열이 올랐던 걸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는 밤새 젖은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고 들었다.
"괜찮다."
나는 짧게 답했다. 그녀는 그 대답에 안심하는 낯빛이 되었다가, 곧 다시 근심으로 돌아갔다. 회풍문 손님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 마음이 얼굴에서 얼굴로 옮겨 다니는 게 보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그녀에게 짧게 일렀다.
"내가 나가 있을 때, 부엌 근처에 있어라. 대청 쪽으로 오지 말고."
"왜요?"
"보일 필요 없는 것도 있다."
문소아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순종적인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것이 필요했다.
마당으로 나서자 바깥 공기가 서늘했다.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마당 흙이 발밑에서 눅눅하게 밟혔다. 낙하문의 담장은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기와가 깨진 자리마다 잡풀이 자라 있었고, 문루의 현판은 반쪽이 떨어져 나가 바람에 삐걱거렸다. 사부가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무너진 돌담을 눈에 담아두었다. 씨를 심어야 할 자리였다. 지금은 잡초만 자라는 땅이지만, 손을 대면 다시 곡식이 자랄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손님은 대청 앞에 서 있었다. 둘이었다.
앞쪽에 선 자는 체구가 다부졌다. 어깨가 넓고 걸음이 무거웠다. 후천육전 수준의 내공을 다진 몸이라는 걸, 걸음걸이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을 누르는 힘이 고르게 퍼졌다. 함부로 배운 걸음이 아니었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밑에 깔린 것은 다른 것이었다. 계산. 저 사내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재고 있었다. 내 걸음의 폭, 어깨의 기울기, 손끝이 떨리는 정도. 그런 것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어 내리는 시선이었다.
뒤쪽에 선 자는 상대적으로 왜소했다. 눈빛이 자주 흔들렸다. 함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이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무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쪽이 더 다루기 쉬운 부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가장 약한 축을 먼저 찾아두는 게 좋다. 오늘은 저 왜소한 자를 눈에 담아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낙하문의 어린 제자를 뵙습니다."
앞쪽 사내가 포권했다. 예의는 갖췄으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상대를 낮춰보는 자의 태도였다. 그 웃음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 뒤에 있는 낙하문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무너진 담장을, 사부 없는 문파를, 열다섯 살 어린 것 하나가 지키고 있는 이 우스운 형국을 향한 웃음.
"말씀 편히 하시오."
나는 담담히 답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지 않았다. 약한 소년의 것이어야 했다. 목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아 갈라지는 소리가 섞여 나왔는데,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회풍문에서 낙하문에 작은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문주가 없는 이곳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함이지요."
사내가 등 뒤의 함을 가리켰다. 약재가 담긴 함이었다. 나는 그 함을 눈으로만 훑었다. 겉보기엔 흠결 없는 선물이었다. 인삼과 녹용 냄새가 살짝 풍겼다. 값이 제법 나갈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저 사내의 눈은, 함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몸의 상태를, 걸음의 균형을, 손끝의 떨림을 재고 있었다. 저 눈이 지금 하는 계산은 하나였다. 이 아이 하나만 없으면, 혹은 이 아이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되면, 낙하문은 그대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계산.
이것은 선물이 아니다. 표적을 확인하러 온 자였다.
나는 겉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마운 뜻, 문에 전하겠소."
속으로는 그의 얼굴과 걸음, 눈빛의 특징을 하나씩 기록해뒀다. 넓은 어깨, 오른발을 살짝 끄는 습관,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버릇. 언젠가 다시 쓸 재료였다. 지금은 알아두는 것만으로 족했다.
사내가 돌아서기 전, 나를 향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서늘했다. 등 뒤로 문소아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엌 문틈으로 얼굴만 살짝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러다 들키면 곤란한데,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속으로 짧게 웃었다.
두 사내가 함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걸음이 여전히 무거웠다. 저런 걸음을 가진 자가 뒤에서 얼마나 있는지, 회풍문의 진짜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었다.
저들이 다시 온다면, 그때는 선물이 아니라 다른 것을 들고 올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을 지붕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함께 마음 한편에 눌러 담았다. 무너진 담장 너머로, 산 아래 마을들의 지붕선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 마을들 중 몇이나 아직 낙하문의 것으로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다 세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회풍문의 다음 걸음은, 오늘의 웃음보다 훨씬 차가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