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눈을 뜨니 다시 왕부의 방이었다.
천장의 무늬가 그대로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은이 여전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늘이 실을 뚫고 나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은 듯했다.
"도련님, 낮잠 잘 주무셨어요?"
"응. 그럭저럭."
소은이 바늘을 내려놓고 이진의 이마를 짚었다.
"땀은 안 나셨네요. 다행이다."
이진은 그 손을 슬쩍 밀어내며 손바닥을 펼쳤다.
부적은 없었다.
현실로 나오면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이미 식어 있었다.
대신 시야 한쪽에 새로운 알림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왕부 정규 수련 과제가 등록되었습니다]
[제1과제: 기초 보법 100회]
이건 시스템이 아니라 왕부의 규칙인 듯했다.
영친왕부 자제라면 다섯 살부터 기초 수련을 받는 게 관례라고, 언젠가 소은이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이진은 아직 세 살이었지만, 시스템이 그 관례를 앞당겨 반영한 모양이었다.
"소은아."
"네, 도련님."
"나 내일부터 마당 나가야 되나."
"벌써 아셨어요? 사범님이 통보 넣으셨나 보네."
소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진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아침, 마당에서 수련 사범이 기초 보법을 시연했다.
느릿느릿한 동작이었다.
발끝이 땅에서 겨우 떨어질 정도의 속도였다.
다른 왕족 자제들이 배우기엔 딱 알맞은 속도였다.
여섯 살, 일곱 살 남짓 되는 아이들 몇이 옆에서 함께 배우고 있었다.
이진에게는 하품이 나올 만큼 느렸다.
'저걸 백 번을 하라고?'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자, 왼발부터 천천히."
사범의 말에 아이들이 발을 뗐다.
이진도 발을 뗐다.
그런데 몸이 사범의 설명보다 먼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 있었다.
발이 저절로 다음 자리를 찾았고, 무게중심이 알아서 옮겨갔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팔이 각도를 잡았다.
[기초 보법 완성도 98%]
[숙련도 이상 감지 - 재검토 요청]
사범의 눈이 커졌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진을 쳐다봤다.
"도, 도련님. 지금 그 동작, 누가 가르쳐 주셨습니까?"
"아무도요."
이진이 태연하게 답했다.
사범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시범을 보였다.
이번엔 조금 더 복잡한 전환 동작이었다.
발을 어긋나게 디디면서 상체를 살짝 비트는 움직임.
이진은 그걸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
오차가 거의 없었다.
사범이 팔짱을 끼고 이진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군요."
뇌 속 어딘가에서 몸의 움직임이 자동으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미리 그려놓은 선을 따라 발을 딛는 것 같았다.
'하급 영근이라도 신체 동조율은 별개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파편이라는 게 벌써 뭔가 영향을 주는 건가.'
이진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아이 하나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사범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이진을 봤다.
비교가 눈에 뻔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1과제 완료: 100회 기준 12회에 도달]
[과제 조기 클리어]
사범이 손에 쥐고 있던 목판을 떨어뜨릴 뻔했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범이 서둘러 마당을 정리시키고 곧장 이천호에게 보고를 올렸다.
***
그날 저녁, 이천호가 직접 마당에 나왔다.
이진은 마루 끝에 앉아 발을 흔들고 있었다.
"진이 네가 정말 그렇게 빨리 배웠느냐."
"보니까 되던데요."
이진이 무심하게 답했다.
이천호가 아들 옆에 앉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사범이 놀라서 말을 더듬더구나."
"그런 걸로 놀라나요."
"보통은 그렇지. 백 번을 채우는 데 열흘도 걸리는 애들이 있다."
이천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아주 미세한 경계가 섞였다.
그 눈빛이 아들에게 향하는 시간이 조금 길었다.
"몸이 좀 이상하지는 않았느냐."
"딱히요."
"어지럽거나, 열이 오르거나."
"없었어요."
이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음 과제도 곧 받게 될 것이다."
"기대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진의 속은 조금 달랐다.
'하급 영근에 뇌령 파편.'
'조건은 알 수 없는 규.'
'뭔가 앞으로 벌어질 일이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을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섰다.
"진아."
"네."
"혹시라도 몸에 무슨 변화가 생기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라."
"왜요, 뭐 걱정되세요?"
이천호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이진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
그날 밤, 잠들기 전 시야 구석에 또 하나의 알림이 떠올랐다.
[히든 던전 재접속 가능]
[안내자 '규'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진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그 문구를 잠시 노려봤다.
'벌써 또야.'
메시지를 열자 짧은 한 줄이 떠 있었다.
[다음 관문은 '자극 3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서두르지 마세요.]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두르지 말라는 말이, 왜 이렇게 서두르라는 소리처럼 들릴까.
'자극 3회.'
'그게 뭔데.'
규가 이걸 왜 지금 보낸 건지, 그 의도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친절하게 정보를 흘려주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핵심은 하나도 안 알려주는 화법.
마치 계속 낚싯줄만 던지는 느낌이었다.
'저 자식,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창을 닫으려는 순간, 알림 하나가 더 떠올랐다.
[경고: 규의 권한 등급이 시스템 규정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진은 그대로 눈을 떴다.
손끝이 순간 차가워졌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오래 쳐다봤다.
방 안은 조용했다.
소은의 숨소리만 옆방에서 낮게 들려왔다.
'권한 등급이 규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 지금까지 규가 준 정보들은 뭐였는데.'
'안내자라는 이름부터가 애초에 허울이었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뒤섞였다.
규가 시스템 밖에서 굴러온 존재일 수도 있었다.
혹은 시스템 자체가 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저 녀석,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불 속에서 손을 꽉 쥐었다.
'다음에 던전에 들어가면, 그때는 나도 좀 캐물어야겠다.'
'서두르지 말라고 했으니까, 오히려 더 서둘러야지.'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이진의 눈만 오래도록 감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