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번개를 품은 황자

1화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지직, 낮은 소음이 이어졌다. 강민준은 모니터에 뜬 결재 반려 메시지를 세 번째로 확인했다. 결재 반려: 사유 - 서식 오류 세 번째였다. 같은 문서, 같은 사유. 강민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게 세 번째면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아니 애초에 이게 반려될 서류였나. 키보드 옆에 놓인 커피가 다 식어 있었다. 한 모금 마셨다. 쓴맛만 남았다. 박동휘 팀장이 그의 자리로 다가왔다. 발소리부터 무거웠다. "이걸 보고서라고 냈어?" "어제 팀장님이 컨펌하신 거 그대로입니다." "내가 언제. 다시 해와." 목소리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강민준은 어제 저장한 메일함을 열었다. 클릭. 박동휘의 승인 답장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승인합니다. 이대로 진행하세요. - 박동휘 타임스탬프까지 명확했다. 어제 오후 6시 12분. "팀장님, 이거 보시면……"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히든 특성 '되돌림' 발동 조건 충족] 알림이 시야 한쪽에 조용히 떠 있었다. 반투명한 글씨. 입사 첫 달부터 보이던 창이었다. 그때는 신입 환영 이벤트인가 싶었다. 회사에서 이런 것도 주나, 하고 넘겼다. 지금까지는 그냥 무시했다. 쓸 데가 없는 기능이라 생각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강민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팀장님." 강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바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이 서식, 팀장님이 재작년에 대학원 논문 낼 때 쓰신 거랑 똑같은데요." 박동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 소리야." "사돈 어르신 통해서 받으신 학위 논문 말입니다." 사무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키보드 소리마저 멈췄다. 누군가 마우스를 클릭하려다 그대로 손을 멈췄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박동휘의 얼굴이 벌게졌다. "됐다. 얘기하다 보니 제가 뭘 잘못 안 것 같네요." 강민준이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아주 태연하게. "아니, 방금 그거 다시 말해봐." 박동휘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지. 그건 나도 아니고 팀장님도 아니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히든 특성 '되돌림': 대상이 은폐한 정보 1건이 주변 3인 이상에게 노출됨] 알림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엔 조금 더 선명했다. 옆자리 대리가 슬쩍 휴대폰을 들었다. 녹음하는 손짓이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녹음 아이콘이 빨갛게 반짝였다. 건너편 자리의 사원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 흥미가 스쳤다. 박동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까지 벌겋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데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게……" 말을 더듬었다. 평소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이었는데. 강민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다시 모니터로 돌렸다.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이게 되돌림이라는 거구나. 숨긴 걸 도로 꺼내주는 거. 꽤 쓸만한데. 그날 오후, 강민준은 조기 퇴근을 신청했다. 결재란에 이유를 적었다. 개인 사정. 그게 전부였다. 승인이 십 초 만에 났다. 평소라면 하루가 걸릴 일이었다. 강민준은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안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박동휘는 자리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강민준은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하철 안에서 휴대폰을 만졌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퇴근 시간이 애매해서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빈자리도 있었다. 강민준은 굳이 자리에 앉지 않고 손잡이를 잡은 채 화면을 들여다봤다. 손끝이 습관처럼 화면을 넘기다 멈췄다. 천선대륙 - 신규 오픈, 지금 접속하면 전설급 아이템 즉시 지급 조악한 배너였다. 색감부터 촌스러웠다. 디자인도 십 년 전 감성이었다. 글씨체는 굴림체였다. 이런 걸 누가 클릭하나 싶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광고를 누가 만드나. 사기 아니야, 이거. 그런데 손가락이 저절로 눌렀다. 자신도 왜 눌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손끝이 먼저 반응했다. 번쩍— 화면이 하얗게 터졌다. 눈앞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지하철 안 사람들이 일제히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강민준의 시야도 함께 하얘졌다. 몸이 붕 뜨는 느낌. 발밑이 사라진 것 같았다. [신규 플레이어 강민준님을 확인했습니다] [천선대륙 서버가 현실과 동기화됩니다] 뭐야 이거. 게임 로그인 화면이 이런 식이었나. 생각할 틈도 없었다. 뉴스 속보가 지하철 전광판에 떠올랐다. 빨간 자막이 빠르게 지나갔다. [속보] 전 세계 동시다발 이상현상, 하늘에 균열 목격돼 [속보] 정부, 국가비상사태 선포 검토 [속보] '천선대륙' 광고 클릭한 인구 다수 실종 승객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안은 여자가 주저앉았다. 정장 입은 남자가 전광판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강민준은 그 소리를 다 듣지 못했다. 의식이 밑으로 빨려 내려가고 있었다. 발끝부터 서서히 감각이 사라졌다. 장난하나. 이건 무슨 게임 오픈 이벤트가 아니잖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다.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지금 회사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이거 진짜 실종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상이 완전히 검게 지워졌다. 암전. 아무 소리도, 아무 빛도 없었다. 그저 깊은 어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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