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번개를 품은 황자

3화

72시간이 흘렀다. 이진은 그동안 방바닥에 누워 천장 무늬를 세다가, 소은의 바느질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다가, 가끔 창밖에서 들려오는 마을 사람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알림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딩— [히든 던전: 이계형 훈련장이 개방되었습니다] [접속 방식: 수면 중 정신 이동] [신체 나이 무관, 정신 연령 기준 적용] 드디어 왔다. 이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슬쩍 올라갔다. 낮잠 시간이었다. 소은이 방문을 슬쩍 열고 들여다봤다. "자는 거지?" 이진은 눈을 감은 채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냈다. 소은이 다시 문을 닫았다. 바느질하는 소리가 옆방에서 다시 시작됐다. 사각사각. 그 소리를 들으며 이진은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의식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 아예 사라졌다.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회색빛 평원. 하늘도 없고 땅도 애매했다. 발밑에 뭔가 밟히는 감촉은 있는데, 눈으로 봐선 뭘 밟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멀리 낡은 창고 같은 느낌의 구조물이 하나 서 있었다. 녹슨 철판을 대충 이어붙인 듯한 외관이었다. [튜토리얼 안내자 '규'가 접속했습니다] 허공에 작은 빛무리가 뭉쳐 사람 형상을 만들었다. 목소리가 어딘가 나긋나긋했다. "환영합니다, 플레이어님. 저는 규라고 합니다." "용건만." 이진이 짧게 답했다. 규의 형상이 잠시 멈칫했다. "보통 신규 플레이어는 좀 더 놀라시는데요." "놀랄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다음 순서 말해봐." 규가 억지로 미소를 짓는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빛무리라 표정이 있을 리 없는데도, 이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보통은 이 시점에서 저와 몇 마디 나누며 세계관 설명을 듣는데요." "세계관은 됐고, 관문 몇 개나 있어?" "...그건 진행하시면서 아시게 될 겁니다." "대답 안 하는 것도 대답이네." 규가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 문 하나가 떠올랐다. [제1 관문: 인지 시험] "이 문을 통과하시면 됩니다." "조건은?" "조건은 없습니다. 그냥 걸어 들어가시면 돼요." 그 말이 더 수상했다. 조건 없는 관문이라니.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이진은 문 앞에 서서 잠시 관찰했다. 문 표면에 희미한 균열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균열 사이로 뭔가 어른거렸다. 예전에 웹게임 광고를 볼 때 느꼈던 그 조악함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광고 문구는 항상 "지금 클릭하면 무료"였고, 클릭하고 나면 항상 뭔가 튀어나왔다. "규." "네?" "이 문, 그냥 들어가면 뭔가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규가 잠시 말이 없었다. 빛무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보통은 눈치 못 채시는데." "그럼 맞다는 거네." "공식적으로는 아무 말도 못 드립니다." "그 말도 이미 대답이고." 이진이 자세를 낮췄다. 손끝에 힘을 모으는 시늉을 했다. 실제로 뭔가 될지는 몰랐지만, 이 세계 몸에 뭔가 잠재된 게 있다면 지금이 시험해볼 때였다. 어차피 확인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이 열렸다. 콰드득— 안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사람 크기의 그림자 짐승이었다. 윤곽만 있고 얼굴이 없는 게 더 기분 나빴다. 콰앙— 짐승이 바닥을 찍으며 달려들었다. 이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바닥이 밟히는 감촉이 그제야 확실해졌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어린 아기 몸이었지만 여기서는 감각이 다르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다.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는, 마치 오래 써본 몸 같은 느낌. [숨겨진 신체 능력치가 일부 개방됩니다] 짐승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이진의 옷깃이 살짝 스쳤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쐐애— 뭐야, 진짜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동시에 머리는 차갑게 돌아갔다. 공포와 계산이 동시에 굴러가는 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 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짧게 끊겼다. 짐승의 움직임에 일정한 박자가 있었다. 찍고, 찍고, 찍고, 도약. 세 번 찍고 한 번 크게 도약하는 패턴. 이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박자를 두 번 더 확인했다. 틀리지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같은 리듬이었다. 이진은 그 박자를 노렸다. 짐승이 세 번째 찍기를 끝내는 순간 옆으로 파고들었다. 숨을 짧게 참았다. 손바닥으로 짐승의 옆구리를 밀쳤다. 퍽— 짐승이 균열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빛무리 같은 잔해가 허공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정적. 이진은 숨을 몰아쉬며 잠깐 서 있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몸이 가벼웠던 것도 잠깐이었지, 막상 힘을 쓰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1 관문 통과] [특성 판정 대기: 자질 뽑기가 곧 진행됩니다] 규의 형상이 다시 나타났다. 표정이랄 게 없는데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다들 여기서 좀 다치는데." "그럼 조건 없다는 말 취소해." "...그건 좀 곤란한데요." "곤란한 게 왜 이렇게 많아?" "저도 정해진 대로 안내만 하는 거라." "정해진 대로면 규정집이라도 좀 보여줘봐." "그건 플레이어 권한 밖입니다." 이진은 그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곤란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물으려는 순간, 허공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영근(靈根) 감정을 시작합니다] [뽑기 진행 중...] 뽑기라니. 이 순간이 앞으로 자신의 성장 방향을 결정한다는 걸 이진은 직감했다. 심장이 살짝 빨라졌다. 규의 시선이 그 창에 유독 오래 머무는 게 이상했다. 빛무리 형상이 그 창을 보며 미묘하게 몸을 움츠린 것 같았다. 저거 봐, 저 반응. 뭔가 있다. 분명히 뭔가 있어. 이진은 눈을 떼지 않고 창을 노려봤다. [뽑기 진행 중...] 이라는 문구가 느리게 깜빡였다. 그 느린 속도가 유독 신경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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