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낡은 몸, 최강의 마법사

4화

해가 뜨기 무섭게 하린은 별궁 지하실에 도착했다. 숨을 곳은 이곳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이 별궁을 드나들며 놀았던 그녀만이 아는 통로였고, 태오의 병사들이 아직 이곳까지는 수색하지 않았다. 지하실은 곰팡내와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오래도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흔적이 벽마다 남아 있었다. 하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낡은 마법진 앞에 섰다. 이 마법진은 그녀의 스승이 남긴 것이었다. '급할 때가 아니면 절대 손대지 말라.' 스승은 늘 그렇게 경고했다. 소환 마법이란 대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도박이며, 실패하면 소환자의 마력이 역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린은 그 경고를 알면서도 지금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법진 중앙에 마력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손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을 끌어올릴수록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런 식으로 온몸의 마력을 쏟아부은 것은 처음이었다. +++ 소환 마법은 대상의 마력 등급에 정확히 반응한다. 5급 마법사인 하린이 온 힘을 다해 끌어올릴 수 있는 최고 등급은 이론상 7급이 한계였다. 그 이상을 소환하려면 소환자의 그릇이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다는 것이 마법학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소환서에 새겨진 이름은 '백현도(白賢道)'였다. 대륙 최강의 법신, 10급 마법사. 200년 전 실험 도중 실종되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이었다. 살아 있는 자라면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본 적 없고, 오직 옛 문헌 속 삽화로만 그 존재가 전해져 내려왔다. '이룰 수 없는 도박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마력을 쥐어짜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다른 패가 없었다. 태오의 병사들이 궁 전체를 뒤지고 있었고, 붙잡히면 살아서 이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었다. 이론이 어떻든, 상식이 어떻든,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남는 방법 하나였다. 마법진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쉬이잉- 빛은 처음엔 희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렬해졌다. 하린의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지하실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일었다. 바닥에 깔린 돌들이 미세하게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벽에 걸린 낡은 등불이 그 진동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하린은 코피를 흘리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코끝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떨어졌지만 닦을 여력조차 없었다. 온 신경이 마법진 중앙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발.' 그녀는 그 한마디만을 되풀이했다. 몸속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대로 몇 초만 더 지속하면 정말로 그릇이 부서질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손을 떼지 않았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 빛이 극에 달한 순간, 진의 중심에서 사람의 형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처음엔 그저 흐릿한 윤곽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 윤곽이 점점 또렷해졌고,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듯 천천히 형태를 갖추어갔다. 빛이 잦아들자, 하린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허리가 살짝 굽었고, 낡은 도포를 걸친 그 노인은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도포는 색이 바랜 지 오래되어 원래 무슨 빛깔이었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린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이럴 수가.' 대륙 최강의 법신이라 불리던 존재가, 눈앞에서는 그저 지쳐 보이는 노인일 뿐이었다. 기록 속의 백현도는 대지를 가르고 하늘을 뒤덮는 위세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노인은, 걸음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이 격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린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긴 어디인가."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그 음성에는 오랜 침묵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마치 목소리를 내는 법조차 다시 익혀야 하는 사람처럼, 한 음절씩 끊어서 발음했다. "당신이... 백현도인가요." 하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상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위험한 존재인지 아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물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렇다. 나는 백현도다." 노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그의 눈빛에는 혼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하실의 낡은 벽과 먼지 쌓인 바닥, 그리고 낯선 옷차림의 소녀까지,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처음 보는 풍경인 듯했다. "200년이라 했나. 내가 갇혀 있던 시간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실감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처럼 건조한 어조였다. +++ 하린은 그 말에 담긴 무게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지금 당장의 위기가 더 급했다. 이백 년이라는 시간이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실종되었던 세월이 그의 안에 무엇을 남겼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릴 여유가 그녀에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 노인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가. '이 노인이 정말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그 법신이란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소환서에 적힌 전설과, 눈앞의 노쇠한 육체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전설 속의 백현도는 손짓 한 번으로 성벽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노인은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해 보였다. '설마 소환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소환서에 새겨진 이름은 분명 백현도였고, 마법진의 반응 또한 정확했다. 잘못된 소환이라면 이렇게 온전한 형체가 나타났을 리 없었다. "당신의 힘으로 저를 지켜주실 수 있나요." 하린이 다급히 물었다. 목소리에 절박함이 실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그녀의 목숨을 좌우할 것이었다. 노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 시선은 마치 그녀의 안쪽까지 들여다보려는 듯했다. 오래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이 몸이 세월을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그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린의 불안을 키웠다. 힘이 남아 있다는 말과, 몸이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는 말은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들렸다. 힘이 있어도 그것을 쓸 몸이 온전치 않다면, 그 힘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린은 그 말의 앞뒤를 곱씹으며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미 소환은 끝났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 노인이 어떤 존재인지와 상관없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끌어내야 했다. +++ 그때, 지하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갑주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컹, 철컹-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계단을 내려오는 듯한 울림이 벽을 타고 전해졌다. 갑주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하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써 찾아냈다니.' 그녀는 그 소리의 정체를 직감했다. 태오가 보낸 추격대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곳까지 좁혀 들어온 것이었다. 마법진의 빛과 진동이 지상까지 새어나갔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곳을 예상하고 병력을 나눠 보냈을 수도 있었다. 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도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저 눈썹을 살짝 좁히며 지하실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저들이... 너를 쫓는 자들인가." 그가 낮게 물었다. 하린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이제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소환에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몸으로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철컹, 철컹- 발소리가 계단 마지막 굽이에 다다랐다. 곧 지하실 문이 열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 뒤에서 나타날 자들이 누구인지, 하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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