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낡은 몸, 최강의 마법사

3화

밤의 궁정은 낮보다 더 위험했다. 낮에는 시종들의 발소리와 근위병의 순찰이 오히려 하린의 존재를 가려주었지만, 밤은 정반대였다. 그림자 하나만 움직여도 눈에 띄는 시간이었다. 하린은 익숙한 뒷문과 정원의 그늘을 골라 몸을 숨기며 본궁을 벗어났다. 어릴 적 유모의 손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던 길이었다. 그때는 놀이였고, 지금은 생사가 걸린 도피였다. '같은 길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하린은 그 낙차를 곱씹을 여유조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몇 번이나 순찰조의 등불이 스쳐 지나갔다. 하린은 그때마다 나무 뒤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등불이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발을 뗐다. 그 짧은 정지의 순간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아버지가 생전에 아끼던 근위기사, 유중산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업어 키운 사람이었다. 부왕이 정사에 바빠 자리를 비울 때마다 유중산이 대신 하린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걸었다. 그가 들려준 무용담과 우스갯소리로 어린 하린은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처럼 여겨도 될 사람이었다.' 그 정도의 정만큼은 진심일 것이라 믿었다. +++ 기사의 숙소는 본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별채에 있었다. 하린은 그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소리는 작았지만 정적을 뚫고 또렷하게 울렸다. 한참의 침묵 뒤에 인기척이 났다. 유중산이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문을 열었다. "공주님?" 그는 놀란 얼굴로 하린을 안으로 들였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하린의 어깨를 짚었다. 어릴 적 넘어질 때마다 붙잡아주던 그 손이었다. "이 밤중에 어떻게, 무슨 일이십니까." 유중산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중산, 도와줘요. 태오가 아버지를... 그리고 이제는 나를 죽이려 해요." 하린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말을 뱉는 동안에도 목이 메어 몇 번이나 끊겼다. "별궁 지하실까지만 데려다줘요. 그것만 해주면 돼요.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유중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계산의 표정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하린의 뒤편, 창밖, 문 쪽을 오갔다. 도움을 줄지 신고를 할지 재는 눈빛이었다. "공주님, 저도 이미 새 대공 전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하린의 눈이 커졌다. "명이라니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공주님을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라는 명입니다." 유중산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문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누군가 지나가지 않는지 확인하는 몸짓이었다. "제가 공주님을 키운 정을 생각해서, 지금 도망칠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이 이상은 바라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하린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시선은 바닥이나 창문, 어디든 그녀를 피해 다녔다. 하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문틀을 짚어야 했다. '정이라니.' 그녀는 그 단어를 속으로 비웃었다. 정이 있는 자라면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이 있는 자라면 신고할 명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입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문을 열어주고 등을 돌렸겠지. "부왕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그렇게 충성을 다짐하지 않았나요." 하린이 낮게 물었다. 원망보다는 확인이었다. 유중산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쪽으로 반걸음 다가섰다. 하린을 밀어내려는 몸짓이었다. "...알겠어요." 하린은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렸다. 더 이상 그에게 기대할 것이 없었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유중산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멀리 가십시오, 공주님. 제가 시간을 오래 벌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린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 숙소를 나선 하린은 궁정 마법사단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이라면 최소한의 원칙이 지켜질 것이라 믿었다. 마법사단은 왕가에 충성을 바치기 전에 학문과 규율에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었다. 적어도 하린이 배운 바로는 그랬다. '그들은 다를 것이다.' 하린은 그 믿음을 붙잡고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당직 마법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문틈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문을 활짝 열지도 않았다. 문틈 사이로 촛불의 흔들리는 빛만 새어 나왔다. "공주님이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이미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마법사가 낮게 속삭였다. "수배령이라니, 벌써..." 하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온 궁정에 명이 돌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태오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부왕의 죽음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저희도 명을 따를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는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아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하린은 그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다시 두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생각이 명치를 짓눌렀다. 근위기사도, 마법사단도, 그녀가 평생 궁정 안에서 안전망이라 여겼던 모든 이름이 하룻밤 사이 적으로 돌아섰다. 부왕이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권력은 사람을 남기지 않는다. 사람을 시험할 뿐이다.' 그때는 그 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뼈에 새겨지듯 아팠다. 궁 안의 모든 권위와 힘은 이미 태오의 것이었다. 그녀가 기댈 곳은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근위대도, 마법사단도, 아마 시종들과 문지기들까지도 이미 새 대공의 명을 받았을 것이었다. 하린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린은 눈물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슬퍼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손으로 닦아낼 여유조차 없었다. 걸으면서 저절로 말랐다. '살아야 한다. 그래야 진실을 밝힐 수 있다.' 그녀는 그 한 문장을 붙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 목적지는 별궁 지하실이었다. 완성해둔 마법진이 그곳에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은밀히 준비해둔 것이었다. 부왕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그때는 만약을 위한 대비였을 뿐, 실제로 쓸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대비가 유일한 살길이 되어 있었다. 대륙 최강의 법신을 부를 수 있다면, 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존재였다. 실체를 본 사람도 드물었고, 소환에 성공한 기록도 몇 되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는 하린도 알았다. 마법서 곳곳에 적힌 실패 사례들을 그녀 스스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별궁으로 가는 길은 본궁보다 어두웠다. 관리하는 손이 줄어든 지 오래된 곳이라 등불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았다. 하린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몸을 숨기기 쉬웠다. 동이 트기 전에 궁을 벗어나야 했다. 해가 뜨면 순찰이 배로 늘어날 것이고, 수배령을 받은 자들의 눈이 곳곳에서 그녀를 찾을 것이었다. 하린은 어둠 속을 달렸다. 발소리를 죄 죽이며,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만을 골라 밟으며,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향해 몸을 던졌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순찰 교대를 알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마치 그녀를 향한 경고처럼 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린은 이를 악물고 더 빨리 발을 놀렸다. 별궁의 낮은 담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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