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허에서 깨어난 후계자

4화

눈을 뜬 순간 세상은 여전히 전투 한복판이었다. 강무영이 우두머리 사내의 검을 막아내다가 무릎을 꿇는 광경이 눈앞에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며 순간적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세상이 통째로 바뀌어 있는 그런 흔한 클리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몸속에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요동치고 있었다. 심장 어딘가에서 뜨거운 기운이 태동하더니, 그것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겨울철 뜨거운 물을 마셨을 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열기 같기도 했고, 오래된 보일러가 처음 가동될 때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소리 없는 진동 같기도 했다. 그 기운이 손끝까지 도달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는데, 다리에 실린 힘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후들거리던 무릎이 이제는 땅을 단단히 딛고 있었다. '이게 투기라는 건가.' 나는 그 낯선 힘에 헛웃음을 흘렸다. 죽다 살아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몸속에 없던 힘까지 생긴다니, 이쯤 되면 이 세계가 나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게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눈앞의 검날이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우두머리 사내의 검이 강무영의 어깨를 다시 베어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데, 무작정 몸을 던져 그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뻗어 나가며 사내의 팔이 그대로 밀려났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손바닥에서 튀어나와 그를 밀쳐낸 것 같은 감각이었다. 사내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고, 나 역시 내 손에서 벌어진 일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손끝이 아직도 뜨끈거렸다. '몸에 손대는 것만으로 밀어낸다니, 이건 무슨 초능력 만화인가.' 전생에 즐겨 보던 만화 속 주인공들이 손바닥을 내밀며 기를 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여유는 정말이지 잠깐이었다. 사내는 곧바로 검을 되돌려 나를 향해 내리쳤고, 그 속도가 조금 전보다 오히려 더 매서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는데, 검날이 살을 파고들기 직전 손끝에서 붉은 기운이 막처럼 펼쳐지며 충격을 흡수했다. 쇳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팔뚝을 타고 저릿한 충격이 올라왔지만 살갗이 갈라지는 일은 없었다. '방어막까지 되는 거면 이거 완전 사기 캐릭터 아닌가.' 나는 그 와중에도 게임 용어를 떠올리며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강무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사내의 옆구리를 베었다. 사내는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는데, 그 눈빛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롭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계산이 어긋난 자의 낭패감이 자리했다. "공자께서... 투기를 다루십니까."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여유도 없이 다시 밀려오는 현기증을 견뎌내야 했다. 몸속의 뜨거운 기운이 아직 낯설어서, 마치 처음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제어가 서툴렀다. 액셀을 밟았는데 브레이크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랄까. 힘이 넘쳐흐르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몸이 그 힘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삐걱거렸고, 관자놀이 부근에서 둔중한 통증이 울렸다. 강무영이 사내를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고, 두 사람의 칼날이 대여섯 번 부딪히며 불꽃 같은 파열음을 냈다. 챙, 채앵, 하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고, 그 소리 하나하나가 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 둘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강무영의 발을 묶는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 강무영의 검이 사내의 방어를 뚫고 목덜미를 그대로 베어 넘겼다. 사내는 눈을 부릅뜬 채 무릎을 꿇었고, 목에서 뿜어 나온 핏줄기가 검은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가는... 다음엔... 이런 운이... 따르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나는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죽는 걸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벌써 몇 번째던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아직 인간이긴 한 모양이었다. 남아 있던 암살자들은 마치 신호를 받은 것처럼 일제히 어둠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일사불란해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해 훈련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며,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직감했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건, 이게 준비된 습격이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 준비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투가 끝난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방금 전까지 쇳소리와 신음이 뒤섞이던 공간이, 지금은 오직 강무영의 거친 숨소리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의 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옷자락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살갗에는 크고 작은 자상들이 붉게 벌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이 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검을 몸으로 받아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가 먼저 나를 붙잡으며 낮게 말했다. "공자님, 지금 그 힘은... 처음 각성하신 겁니까." 그의 눈빛은 상처의 고통보다도 그 질문에 대한 답에 더 목말라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세히 설명할 재간도 없었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그 건조한 문어체 말투 속에는 순수한 의문과 더불어 아주 미세한 경계심이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 질문에 딱히 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속으로는 '나도 알고 싶다, 이 사람아. 나도 눈 뜨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설명하면 믿어줄 텐가' 하고 되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가는 강무영의 눈빛이 더 복잡해질 게 뻔했기에, 나는 그냥 침묵을 택했다. "공자님답게 신비로우신 대답이시군요." 강무영이 낮게 내뱉었는데, 그 말투에는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아주 살짝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이 상황에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여유로운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강무영이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그의 팔을 내 어깨에 걸치며 힘을 주는데, 방금 전까지 낯설던 뜨거운 기운이 이번에는 조금 더 매끄럽게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페달을 밟는 감각을 서서히 익혀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저택 방향에서 불길이 치솟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검붉은 화염이 밤하늘을 향해 솟구쳤고, 그 위로 검은 연기가 뒤덮이며 넓게 번져 갔다. 매캐한 탄내가 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밀려왔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 도주가 끝난 게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박거석은...'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 쓰러져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이미 그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핏자국만이 흙바닥에 흥건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걸 느꼈다. 죽은 자가 아니고서야,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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