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허에서 깨어난 후계자

1화

경주 천마총 발굴 현장은 오늘도 흙냄새로 가득했다. 습기를 머금은 붉은 토양 냄새에 이따금 섞여 드는 풀 비린내, 그리고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흙먼지까지, 십 년 넘게 맡아온 냄새인데도 질리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 이현은 삽 대신 붓을 든 채 벌써 세 시간째 같은 자리에 웅크려 앉아 있었는데, 서른둘 먹은 몸뚱이가 이 정도 자세를 버텨낸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박사 학위 받으면 편해진다더니, 누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손끝은 정교하게 흙을 걷어내고 있었는데, 이 바닥에서 밥벌이를 해온 관성이 몸에 새겨진 탓이었다. 옆에서 후배 조교가 물병을 건네며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선배님, 이러다 허리 나가시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 다 점심 먹으러 갔는데." 나는 그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붓끝에 걸리는 이물감에 집중했다. 손목이 저릿한 걸 보니 오래 앉아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이 정도 감각을 무시하는 것도 이 직업의 기본기라면 기본기였다. "먼저 가서 먹어. 여기 뭔가 나올 것 같아서." 조교는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자리에서 나는 흙을 조금씩, 조금씩 걷어냈다. 십 년 넘게 이 일을 해오면서 생긴 감이라는 게 있었는데, 유물이 가까워지면 손끝의 감촉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흙의 입자가 더 곱고, 압력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정확히 그 감각대로, 흙 속에서 드러난 것은 금동으로 된 자그마한 파편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지금까지 발굴 기록에서 본 어떤 것과도 달랐다. 둥근 원 안에 겹겹이 새겨진 나선형 무늬가,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논문 하나 더 쓰게 만들려고?' 나는 픽 웃으며 그 파편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파편을 손끝으로 감싸 쥐는 순간, 표면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처음엔 손이 저려서 그런가 싶었지만, 진동은 점점 강해지며 팔목을 타고 어깨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벌집을 손에 쥔 것 같은, 웅웅거리는 느낌이었다. '정전기인가, 아니면 내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혈액순환이 안 되는 건가.' 나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자평하며 파편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 문양 속 붉은빛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반사광인가 싶었지만, 빛은 파편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게 분명했다. 이건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현상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에서 이명이 울리는가 싶더니, 발밑의 흙이 통째로 꺼지는 듯한 감각이 몰려왔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동시에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감이 치솟았다. '설마 유적이 무너지는 건가.' 그런 실없는 걱정을 하는 사이,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건 손끝에 여전히 쥐고 있던 파편의 뜨거운 감촉이었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서까래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붉은 비단 장막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향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어라, 병원인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끝으로 만져본 이불의 감촉이 병원 시트와는 전혀 달랐다. 비단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지는 매끄러운 감촉의 비단. 병원이라면 이런 걸 침구로 쓸 리가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팔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데, 원래 내 팔뚝은 이렇게 가늘지 않았다. 발굴 현장에서 삽질과 곡괭이질로 단련된 팔뚝이 아니었다. '이거 완전 다른 몸인데.'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광대가 낯설게 튀어나와 있었고, 손가락은 나보다 훨씬 가늘고 길었다. 손톱 모양까지 달랐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지만, 나는 애써 숨을 고르며 상황을 분석하려 했다. '침착해라, 이현. 학자답게 관찰부터 하는 거다.'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은 상당히 넓었다. 자개장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산수화 족자가 걸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었다. 이런 규모의 방을 쓸 수 있다는 건 최소한 평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고고학자가 유물 만지다가 사극 세트장에 뚝 떨어졌다, 이건가.' 나는 헛웃음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앉으려 애썼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한복과 비슷하지만 소매와 저고리 길이가 다른 재단의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낮게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반색하며 소리쳤다. "공자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 호칭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직업적 습관이 발동하여 짐짓 여유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공자라니, 내가 누군가?" 여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이가(李家)의 둘째 공자, 이현 님이십니다. 사흘째 열병으로 앓아누워 계셨습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는데, 이름이 같다는 게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일 줄은 몰랐다. '이현이 이현으로 바뀌었다니, 이건 우연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짓궂군.' 발굴 현장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판에, 이름까지 그대로 가져온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열병이라... 그렇군. 물이라도 한 잔 주겠나."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보려 했지만, 목소리마저 낯설게 들려서 순간 당황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더 높고, 조금 더 가늘었다. 여인은 얼른 물을 따라 건넸고, 나는 그것을 마시며 시간을 벌었다. 물맛조차 낯설었다. 곧이어 방문이 다시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들어왔다. 딱딱한 표정과 절제된 걸음걸이가 딱 봐도 무인의 것이었다.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걸 보니 실전 경험이 상당한 자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예를 갖춘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자님, 몸은 어떠십니까." 나는 그를 훑어보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그가 담담하게 답했다. "강무영입니다. 호위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 짧은 대답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신뢰가 가는 무언가를 느꼈는데,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피하지도, 아부하듯 웃지도 않는, 오직 사실만을 전달하는 듯한 태도였다. '적어도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군.' 나는 그렇게 판단하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팔이 후들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사흘이나 앓았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묻자 강무영은 잠시 침묵했다가 답했다. "정원에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의원도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히 원인을 못 찾겠지,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 몸을 차지했다는 걸 어떤 의원이 진단할 수 있겠는가. 강무영은 내가 몸을 가누는 걸 지켜보다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가주께서 명하셨습니다. 공자님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숨이 멎는 느낌이었는데,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만지다가 갑자기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완전히 낙하산 인사 아닌가. 인사청문회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이유가 있겠지?" 강무영은 짧게 답했다. "장자께서 두 달 전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가에는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그 무미건조한 어조에서 나는 이 세계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형이 죽고 두 달 만에 동생이 후계자로 지목된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지만, 지금 그런 걸 캐물어봐야 이 낯선 몸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장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뭔가 밝혀진 게 있나?" 내가 넌지시 묻자 강무영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의원은 급성 심장마비라 진단했습니다.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그 대답이 너무 정확하고 짧아서 오히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여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공자님,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고 좀 더 쉬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눕혔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발굴 현장의 이현으로 돌아갈 방법도 모르는 채, 낯선 몸과 낯선 신분, 그리고 석연치 않은 죽음까지 떠안게 된 셈이었다. '이거 완전 첫 학회 발표 전날보다 더 정신없군.' 그날 밤, 나는 낯선 방의 창가에 앉아 어둠에 잠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는데,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별빛이 유난히 밝았고,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며 벽에 어른거렸다. 정원 저편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고, 그 소리가 오히려 정적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그림자들 중 하나가 유난히 부자연스럽게 멈춰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바람에 흔들리는 다른 나무 그림자들과 달리, 그 그림자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담벼락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저건 나무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며 조용히 몸을 낮췄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소리마저 죽였다. 창밖의 그림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담벼락을 넘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