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독 먹었더니 고수가 됐다

5화

새벽빛이 창호지를 뚫고 스며들었다. 희뿌연 빛줄기가 방 안을 가로질러, 이강진의 얼굴 위에 옅은 그림자를 그렸다. 이강진의 눈꺼풀이 다시 한 번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열렸다. "...!" 여진탁이 숨을 들이켰다. 그는 사흘 동안 이강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물을 적셔 입술을 축여주고, 몸을 닦아주고, 밤마다 촛불을 켜둔 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지금,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던 그 눈이, 정말로 떠지고 있었다. "강진아! 깨어난 거야?" 여진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강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눈앞에서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움직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그 동작이, 그에게는 낯설고도 익숙했다. 그의 눈빛이 이상했다. 분명 열다섯 소년의 눈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이는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수만 년의 시간을 거쳐온 노인의 시선이, 소년의 얼굴에 그대로 얹혀 있는 듯했다. 이강진의 머릿속으로, 익숙하지 않은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연단술의 오묘한 이치. 영초와 영단의 배합, 그 하나하나의 성질과 조화. 기맥을 읽어내는 안목, 그리고 그 기맥 속에 흐르는 영기의 결. 화후를 조절하는 손끝의 감각. 그리고, 배신 속에서 죽어가던 어느 절대자의 원한. 수백, 수천 개의 단방(丹方)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았다. 마치 평생을 연단술에 바친 사람처럼, 그 지식들은 이강진의 뇌리에 이미 새겨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단휘." 이강진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말한 순간,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삼만 년 전 원영기 경지의 대연단사, 단휘. 천하를 뒤흔들 정도의 연단술을 지녔으나, 동료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자. 그의 기억, 그의 지식, 그의 원한이, 이제 이강진의 영혼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그저 아주 오래된 것들이 침전된 듯한 무게감. "강진아,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여진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는 이강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차가웠던 손끝에, 이제는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돌고 있었다. "괜찮은 거지? 사흘 동안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어. 다들 네가 그냥 폐인이 된 채로...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여진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이강진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단 영지에서 유일하게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사람이 바로 여진탁이었다. 이강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동작 하나에도, 예전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느리지만 흐트러짐이 없는, 마치 오랜 세월 수련한 노고수의 움직임 같았다. "여진탁 형님." 이강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열다섯 소년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조에는 이전에 없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사흘 동안 곁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여진탁의 눈이 붉어졌다. "뭐가 고마워, 인마. 당연한 거지." 그는 애써 웃으며 눈가를 훔쳤다. "너 없으면 나는 여기서 진짜 심심해서 죽었을 거야. 알아?" 이강진은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전의 순박함과, 지금의 깊이가 함께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눈을 감고, 내부로 의식을 가라앉혔다. 경맥은 여전히 대부분 끊어진 상태였다. 단전 역시 텅 비어, 기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즉 숨이 끊어졌을 상태였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단휘의 원영지기가, 최소한의 생명력만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꺼지지 않는 촛불의 심지처럼,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다. '경맥은 다시 이을 수 없다.' 단휘의 지식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단술로 만든 영단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 무공이 아닌, 다른 길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는 여전히 폐인이었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 남들에게는 조롱과 경멸의 대상.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더 이상 폐인의 눈이 아니었다. "강진아, 뭐 좀 먹을래? 죽 끓여놨는데." 여진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네, 조금 이따가요." 이강진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 "밖에 좀 나가보고 싶습니다." "어? 아직 몸도 안 좋은데..." "괜찮습니다." 이강진이 처소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단 영지의 아침 공기가 그의 얼굴에 닿았다. 차갑고 습한 공기였다. 사흘 전과 다를 것 없는 공기였지만, 이강진은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그리고, 저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조성민. 조민아. 두 사람은 하단 영지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아침 훈련을 하러 가는 길이었던 듯, 각자 목검을 들고 있었다. 조성민의 얼굴에는 얼핏 놀란 기색이 스쳤다. "강진이... 네가 깨어났다고?" 그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을 가장한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죽거나, 최소한 완전히 무너져야 했던 계획이었다. 외숙부가 건네준 그 단약을 먹인 뒤, 강진의 경맥이 모조리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성민은 속으로 안도했었다. 이제 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이렇게 눈을 뜨고 걸어 나온 것은, 그의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조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강진을 향했다가, 이내 슬며시 피했다. 그녀의 손끝이 목검 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강진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예전이었다면 반가움에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성민이 형, 민아 누나!" 하고 달려가 인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조성민의 얼굴 아래, 미세하게 흐르는 기맥의 결.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굳혀진 표정 근육의 떨림. 호흡이 미묘하게 빨라지는 것. 눈동자가 흔들리는 방향과 속도. 단휘의 안목이, 이강진의 시선을 통해 조성민의 속내를 읽어내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는 자의 몸은 절대 완전히 태연할 수 없다. 아주 작은 균열이 반드시 드러난다.' 단휘의 기억 속에서, 그런 이치가 떠올랐다. "성민아." 이강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이상한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날, 나한테 준 그 단약.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조성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뭐라고?" 그의 목검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영약이었다며. 대비 전에 먹으면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 후로 내 경맥이 다 끊어졌을까." 이강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조성민은 처음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이강진의 눈이, 자신의 속을 그대로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평소의 그 어리숙하고 순박한 눈빛이 아니었다. "강진아, 나는... 그건 정말 몰랐어. 외숙부가 그렇게 준 거라..." 조성민은 말을 더듬었다. 그의 시선이 자꾸만 이강진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외숙부께서는 그게 정말 좋은 영약이라고 하셨어. 나도 속은 거야." "그래?" 이강진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예전의 순박한 웃음이 아니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 서늘한 웃음이었다. 조성민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두려움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지, 이 느낌은...' 분명 경맥이 끊어진 폐인일 텐데. 분명 무공 하나 익힐 수 없는 몸일 텐데. 그런데 왜 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불편한 걸까. 조민아가 조심스레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저, 저는 이만..." 그녀는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든 듯,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민아야." 이강진이 그녀를 불렀다. 조민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괜찮아. 가도 돼." 이강진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애원도 없었다. 오히려 그 무심함이, 조민아의 가슴에 더 깊은 찔림을 남겼다. 만약 그가 원망하며 소리쳤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담담함은, 마치 그녀의 배신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놓아주는 것 같아서,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갔다. 조성민 역시 어색한 웃음을 남긴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강진아." 그의 발걸음은 도망치듯 빨랐다. 여진탁이 이강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방금 두 사람 사이에 흐른 미묘한 긴장감을 어느 정도 느낀 듯했다. "강진아, 너... 뭔가 달라졌어. 그 눈빛..." 여진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는데, 예전이랑 완전히 달라.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이강진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삼만 년 전의 원한과 열다섯 소년의 상처가 겹쳐지고 있었다. 단휘의 원한.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배신의 아픔. 그 두 가지가 하나로 뒤엉켜, 이강진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형님." 이강진이 낮게 말했다. "저는 아직 폐인입니다. 경맥은 끊어졌고, 무공도 익힐 수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늘고 여전히 힘없는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그 손끝에서, 이강진은 이전에 없던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다른 길로 가겠습니다." 여진탁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강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하단 영지 뒤편의 산맥으로 향했다. 그곳 어딘가에, 오래전 봉인되었다는 연단술의 흔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단휘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수만 년 전, 단휘가 심혈을 기울여 남겨둔 무언가가, 그 산맥 깊은 곳에 여전히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무공으로는 다시 설 수 없는 몸. 하지만 연단술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경맥이 끊어졌다 해서, 모든 길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단휘의 목소리가, 이강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했다. '무공이 아니어도, 이 세상 위에 설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이강진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옅은 금빛 기류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여진탁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이강진의 표정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저 멀리 사라진 조성민과 조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강진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배신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무공이 아닌 다른 힘으로, 반드시 되갚아줄 것이라고. 산맥 위로 걸린 옅은 구름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이강진의 눈빛 속에, 삼만 년의 시간과 열다섯 해의 시간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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