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과거, 삼만 년도 더 된 어느 날.
천하가 아직 여러 개의 대륙으로 나뉘기도 전, 아득히 먼 시절.
하늘과 땅의 경계가 지금과는 달랐고, 영기(靈氣)가 지금보다 백 배는 짙었던 시절.
그 시절, 연단술(煉丹術)의 정점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원영기(元嬴期) 경지에 이른 대연단사, 단휘(段輝).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천하제일단(天下第一丹)'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만든 단약 하나로 멸망 직전의 왕국이 되살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의 손을 거친 영약은 죽은 자를 살리지는 못했으나,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천하 각지에서 몰려온 이들이 그의 문하에 들기 위해 몇 달씩 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름은 천하 어디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고, 그가 걷는 길에는 언제나 꽃이 뿌려졌다.
하지만 그 영광의 정점에서, 그는 가장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을 맞았다.
동문수학한 여덟 명의 동료들.
함께 피를 나누고, 함께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이들.
그날 밤, 그들은 단휘의 처소에 은밀히 모여들었다.
"사제들, 어찌 이러십니까."
단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동료들이 그의 몸에 독을 흘려넣던 순간이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든 영약들이, 이제는 그를 죽이는 독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아이러니를, 단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다만 냉소만이 돌아왔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동료, 사문 서열 이위였던 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독즙이 묻은 침이 들려 있었다.
"당신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 죄외다."
동료 중 하나가 그렇게 답했다.
존대는 지키되, 그 안에 담긴 냉혹함은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사형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야 했지요. 사형의 이름이 곧 우리의 이름이었고, 사형의 실패가 곧 우리의 실패였습니다. 그것이... 지겨웠소이다."
단휘의 눈이 크게 떨렸다.
평생을 함께한 이들의 진심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었다.
"이보시오, 사형. 원망하지 마시구려. 이것이 세상의 이치외다. 너무 밝은 별은, 결국 주변의 별들에게 가려지는 법이니."
단휘는 그렇게 죽었다.
독이 전신의 경맥을 타고 흐르며, 그가 평생 쌓아 올린 공력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마지막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배신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원영기 경지에 이른 그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소멸하지 못할 만큼 짙은 원한(怨恨)이, 그의 혼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평생을 바친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뿌리 깊은 배신감이었다.
그 원한은 삼만 년의 시간 동안, 허공을 떠돌았다.
소멸하지도, 안식하지도 못한 채.
때로는 산맥 위를 떠돌았고, 때로는 대해의 밑바닥에 잠겨 있었다.
수많은 왕조가 일어나고 무너지는 것을, 그 원한은 무심히 지켜보았다.
오로지 하나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과 닮은 원한을 가진 자.
배신 속에서 무너진 자.
그 영혼과 공명할 수 있는 그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만 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이 그 원념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공명하지 못했다.
그들의 원한은 단휘의 것에 비해 너무 얕았고, 너무 옅었다.
※※※
검성문 하단 영지, 이강진의 처소.
이강진이 시상대에서 쓰러진 지, 한 시진이 지났다.
그는 처소로 옮겨진 뒤,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작고 허름한 방이었다.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그곳은, 하품 제자들에게 배정되는 전형적인 처소였다.
벽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침상은 낡아서 삐걱거렸다.
의식이 완전히 끊긴 그의 몸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공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래 하품이었던 그의 영근이, 삼만 년을 떠돈 원영기 경지의 원념과 맞닿았다.
'스으으으.'
이강진의 몸에서 옅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파동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영기를 느낄 수 있는 고수가 있었다면, 그 미세한 파동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단휘의 원념이, 이강진의 영혼 속으로 서서히 밀려들었다.
삼만 년 동안 쌓인 지식과 안목, 그리고 사그라들지 않는 원한이, 이강진의 텅 빈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너와 나는 닮았다.'
목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강진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런 문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배신 속에서 무너진 자. 너 역시 그러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융합이 아니라, 침식이었다.
하나의 영혼이 다른 영혼의 빈틈을 파고들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이기도 했다.
경맥이 완전히 파괴되어 죽어가던 이강진의 몸이, 단휘의 원영지기(元嬴之氣)에 의해 서서히 재구성되고 있었다.
파괴된 경맥의 조각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지듯 하나씩 연결되었다.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경맥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경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
그 사흘 동안, 이강진의 곁을 지킨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여진탁.
검성문 하단 영지에서 잡일을 도맡던 말단 도인이었다.
영근이 없어 무공을 익히지 못했지만, 성실함으로 영지에 남아 있던 청년이었다.
남들이 무공 수련에 매진할 때, 그는 부엌일과 청소를 도맡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강진아, 강진아. 정신 좀 차려봐라."
여진탁이 젖은 수건으로 이강진의 이마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수건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이강진의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다른 이들은 이미 이강진을 폐인으로 낙인찍고 관심을 거둔 지 오래였다.
조성민도, 조민아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강진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너를 버렸다고 해도, 난 안 그런다. 넌 나한테 몇 번이나 밥 나눠준 놈이잖냐."
여진탁은 이강진이 평소 자신에게 베풀었던 작은 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품이라며 무시당하던 그를,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준 사람이었다.
남들이 여진탁을 영근 없는 병신이라 부르며 밥그릇조차 챙겨주지 않을 때, 이강진은 조용히 자신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영근이 있고 없고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 사람이 사람인 게 중요한 거지."
이강진이 언젠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여진탁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 한마디가, 여진탁에게는 세상 전부보다 무거웠다.
첫날 밤, 이강진의 몸이 갑자기 뜨거워지며 격렬하게 떨렸다.
"으윽... 크윽..."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여진탁이 놀라 그의 몸을 붙잡았다.
"강진아! 정신 차려, 인마!"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찬물을 떠 와 이강진의 이마에 올렸다가, 다시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 몸을 닦았다.
의술을 아는 것도 아니었고,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곁에 앉아,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스스스스.'
이강진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류가 방 안의 촛불을 가늘게 흔들었다.
여진탁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이강진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둘째 날, 이강진의 몸에서 미약한 열기와 함께 옅은 기류가 흘러나왔다.
여진탁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곁을 지켰다.
"이게 뭔데... 뭔데 이렇게 뜨거운 건데."
그는 이강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열기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피부에 닿는 순간 화끈거리는 그 기류는, 분명 평범한 열병의 그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여진탁에게 그런 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이강진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여진탁의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그러나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혹시라도 이강진이 눈을 뜨는 순간을 놓칠까 두려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봐라, 강진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강진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가,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셋째 날 새벽, 이강진의 몸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격렬했던 떨림이 멈추고, 뜨거웠던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여진탁은 지친 몸을 벽에 기대었다.
사흘째 잠을 제대로 못 잔 그의 눈에는 짙은 그늘이 앉아 있었고, 뺨은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제 곧 깨어날 것 같은데..."
여진탁이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 안의 촛불은 이미 다 타서 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여진탁은 여전히 이강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넌 꼭 깨어날 거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는 이강진의 손을 다시 한번 꼭 붙잡았다.
차가웠던 손끝에서,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강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진탁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강진아?"
떨림은 점점 커졌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눈꺼풀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여진탁은 숨을 죽인 채,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사흘 동안 기다려온 그 순간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