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무전기는 이제 완전히 죽은 물건이 되어 있었다.
치직, 치이익.
잡음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박준혁이 몇 번이나 스위치를 껐다 켰다.
다각.
다각.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만 무의미하게 반복됐다.
"이딴 게 왜."
그의 목소리에도 짜증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무전기를 빼앗아 귀에 대봤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죽음보다 조용했다.
"배터리는요."
"확인했어. 문제 없어."
"그럼 뭐가."
"몰라 그것도."
박준혁이 무전기를 바닥에 내리치려다 멈췄다.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 습기 찬 시멘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끝에 또 다른 철망이 보였다.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는 됐다.
철망 위쪽엔 녹슨 가시줄까지 감겨 있었다.
반대편으로 걸어봤다.
또 철망.
또 걸어봤다.
또 철망.
전부 막혀 있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이 구역만 남기고 다 봉쇄해놓은 것처럼.
"최덕수가 우릴 여기 가둔 거 같습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그쪽으로 결론이 갔다.
머릿속에서 몇 개의 사실이 저절로 이어졌다.
배정된 구역, 유난히 늦게 나온 장비, 그리고 이 무전기.
우연이 세 번 겹치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몰라. 하지만."
박준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장부 조작하는 놈이면, 사람 하나 못 챙긴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
그 말에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분노였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여기 목숨을 걸고 왔다.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 돈을 들고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의 다리, 어머니의 눈, 그 대신 내가 벌어야 하는 삶.
그 모든 무게를 지고 왔는데.
이런 데서 개죽음이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영화였으면 지금쯤 주인공 보정으로 어디선가 구조대가 나타났어야 했다.
근데 여긴 그런 거 없다.
여긴 그냥 현실이다.
"뚫자."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뭘로."
박준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봤다.
"저 낡은 배관."
건물 뒤편으로 통하는 녹슨 배관을 가리켰다.
지름이 좁았지만 사람 하나는 들어갈 크기였다.
표면엔 붉은 녹이 두껍게 덮여 있었고 곳곳이 부풀어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종기 같았다.
박준혁이 창으로 배관 입구를 두드렸다.
텅, 텅.
녹이 부스러져 떨어졌다.
안쪽에서 텅 빈 울림이 되돌아왔다.
깊다는 뜻이었다.
"해보자."
그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서 확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인정하는 목소리였다.
***
배관 안은 어둡고 좁았다.
들어가자마자 후텁지근한 냄새가 밀려왔다.
쇠 비린내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손끝으로 벽을 짚으며 기어갔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숨소리가 벽에 부딪혀 크게 울렸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내 숨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이 없었다.
무릎이 배관 바닥의 이물질에 계속 걸렸다.
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앞서가던 박준혁이 갑자기 멈췄다.
"쉿."
낮은 소리였다.
나도 그대로 멈췄다.
숨을 참았다.
앞쪽에서 뭔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쓰스슥.
뱀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뱀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바닥을 타고 진동이 전해졌다.
무언가가, 무겁고 긴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배관 끝, 희미한 빛이 새어드는 곳에서 커다란 형체가 움직였다.
처음엔 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리가 여섯 개였다.
몸통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등에는 딱딱한 껍질이 비늘처럼 겹쳐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뻗은 두 개의 긴 촉수.
촉수는 마치 살아있는 별개의 생물처럼 천천히 허공을 더듬었다.
독설치가 아니었다.
이렇게 큰 개체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교육 과정에서 봤던 어떤 도감에도 이런 건 없었다.
"저게, 뭡니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박준혁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 흔들림이 내 심장까지 옮겨왔다.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없었다.
대신 촉수 끝에 붉은 점 같은 감각기관이 반짝였다.
그것이 우리 쪽을 정확히 향했다.
뭔가를 '보는' 게 아니라 '감지하는' 것 같았다.
체온일까, 진동일까, 아니면 숨소리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붉은 점이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
"뛰어!"
박준혁이 외쳤다.
배관을 뒤로 기어 나오는 동안 뒤에서 무언가 벽을 긁는 소리가 났다.
끄으윽, 끄으윽.
금속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배관 벽이 안쪽으로 휘어졌다.
내 팔꿈치가 배관 벽에 부딪혀 살갗이 벗겨졌다.
아픈 걸 느낄 새도 없었다.
몸이 알아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긁혀도 멈추지 않았다.
앞에서 박준혁의 발뒤꿈치만 보였다.
그것만 보고 기었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쓰스슥, 쓰스슥.
거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밖으로 굴러나왔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마자 거대한 형체가 배관을 뚫고 튀어나왔다.
쩌 억―.
낡은 배관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날카로운 것이 뺨을 스쳤다.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피였다.
녀석의 전신이 드러났다.
몸길이가 사람 키의 두 배는 됐다.
여섯 개의 다리가 지면을 딛고 서자 그 무게에 바닥이 살짝 울렸다.
촉수 두 개가 허공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붉은 점이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었다.
등급이 다른 존재였다.
이건 2성급 임무 대상이 아니었다.
"금급이다."
박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상황의 심각성이 제대로 느껴졌다.
"이런 게 왜 여기."
답을 알 리 없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관리국의 실수, 최덕수의 배정 조작, 아니면 그냥 이 구역 자체가 처음부터 통제 불가능한 곳이었을 가능성.
어느 것도 지금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우리는 애초에 이런 걸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임무서에는 독설치라고 적혀 있었다.
작은 개체, 무리 지어 다니는, 2성급.
이건 그 어떤 항목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녀석이 촉수를 세우며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마다 땅이 미세하게 울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막힌 철망, 앞은 저 괴물.
박준혁이 창을 앞으로 겨눴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이 무게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뭘 쥐어야 할지 몰랐다.
녀석의 촉수 끝, 붉은 점이 한층 밝게 반짝였다.
마치 웃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