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 혼사 무르겠습니다

3화

그날 이후, 이도윤의 일상은 겉보기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아침마다 마당에서 검술 수련을 흉내 냈다. 목검을 쥔 손목이 삐뚜름하게 꺾였고, 발걸음은 어설프게 엉켰다. 지켜보는 하인들의 시선 속에서 그는 매번 넘어졌고, 매번 다시 일어섰다. 그 반복이 마치 각본처럼 익숙해질 무렵, 저녁이면 방에 틀어박혔다. 저택의 하인들은 여전히 그를 '반쪽짜리 도련님'이라 수군거렸다. 지나가는 시선 속엔 동정과 조롱이 반씩 섞여 있었다. 겉으로는, 완벽한 폐물이었다. 하지만 방문이 닫히고 나면, 다른 세계가 열렸다. 이도윤은 서랍 깊숙이 숨겨둔 낡은 종이와 먹을 꺼냈다. 손끝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먹의 씁쓸한 향이 방 안에 낮게 깔렸다. 붓을 쥔 손끝에서 서령의 기운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처음 며칠은 그저 감각을 익히는 데만 시간을 썼다. 붓끝에 기운을 흘려보내면, 종이 위에 미세한 온기가 남았다. 손가락 마디마디로 스며드는 감각은 마치 얼음물에 담긴 손을 조금씩 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서생의기라는 건가.' 확신은 없었다. 다만 감각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붓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 그 진동이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오는 감각을 그는 몇 번이고 되짚었다. 그는 밤마다 몰래 글을 썼다. 지구에서 읽었던 이야기들, 기억 속에 남은 문장들을 하나씩 되살려 옮겼다.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자신의 방식으로 메웠다. 문장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게 맞나. 이 흐름이, 이 감정이.' 자문자답이 이어졌고,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붓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호지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을 옅게 물들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종이 위의 글자들이 아주 미세하게 빛을 냈다. 처음엔 눈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는 우연이라 생각했다. 세 번째, 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진짜다.' 확신이 들었다. 이건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서생의기는, 명작이라 불릴 만한 글에 반응하고 있었다. 종이 위에 스며든 빛은 마치 서리가 앉듯 얇게, 그러나 분명하게 퍼져나갔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는 그 순간의 잔광을 몇 번이고 눈에 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저택 앞뜰에 낯선 방문객이 찾아왔다. "임설화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전언에, 이도윤은 붓을 내려놓고 표정을 정돈했다. 먹물이 마르지 않은 종이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는 손길이 빠르고 조심스러웠다. '벌써 움직이는군.' 예상보다 빨랐다. 대전에서의 그 짧은 대화 하나로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는 옷매를 정리하며 낮게 숨을 골랐다. 앞뜰로 나가자, 화려한 청록색 의복을 입은 임설화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 뒤로 시녀 두 명이 조심스레 서 있었다. 임설화의 시선은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도윤의 발끝에서 정수리까지를 훑었다. 마치 값을 매기려는 눈초리였다. "오랜만이네요, 이 공자." 임설화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냉소가 서려 있었다. "임 소저께서 이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궁금해서 왔어요." 그녀가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말하던 게 어떤 속셈이었는지." 이도윤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군.' "속셈은 없었습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사실이라니, 뭐가요?" 임설화가 한 걸음 다가섰다. 향긋한 분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도 포함해서요." 임설화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이렇게 담담하게 대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특히 '폐물'이라 불리는 자에게는 더더욱. 부잣집 자제들은 그녀 앞에서 늘 말을 더듬거나, 지나치게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눈도 피하지 않았다. "흥."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좋아요. 확실히 해두죠. 나와 승부해서, 삼 초 안에 이기면 이 혼약을 완전히 파기하겠어요."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 시녀가 조심스레 임설화의 옷깃을 붙잡으려다 눈치를 보고 손을 내렸다. 임설화의 실력은 청하성에서도 소문난 것이었다. 기령경 칠 중. 열여섯의 나이에 그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재녀였다. 폐물로 알려진 이도윤이 그 앞에서 삼 초를 버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삼 초 승부라···' 이도윤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몸속의 검령이 미약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 몸에 잠재된 검생의 힘이, 아직 완전히 봉인에서 풀려나지 않은 채로. 그 반응은 마치 잠든 짐승이 숨을 고르며 뒤척이는 것 같았다. 미미하지만 분명한 움직임.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는 짧게 계산했다. 승부에 응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있는 것. 이겨봤자 헛소문만 더 커질 것이고, 지면 폐물이라는 낙인이 더 단단해질 것이다. 어느 쪽도 그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거부하겠습니다." 임설화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뭐라고요?" "거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도윤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겨도, 져도,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승부입니다. 임 소저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무대에, 제가 서줄 필요는 없지요." "당신···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시녀들이 저마다 눈을 마주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존중하는 겁니다." 이도윤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당신은 강자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말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임설화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를 만나왔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조용히 되받아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굽신거리거나, 혹은 겉으로만 자존심을 세우다 물러나는 부류였다. 그때였다. 앞뜰 담장 너머,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서 있었다. 설유란이었다. 그녀는 임설화의 뒤를 은밀히 따라온 참이었다. 담장의 낮은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녀는 숨소리조차 낮추고 있었다. '저 아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군.' 설유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대전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오늘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폐물이라 불리는 자가 저리도 정연한 논리로 강자를 상대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담장 틈으로 시선을 좁혔다. 이도윤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흥, 됐어요." 임설화가 억지로 표정을 수습하며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져 있었다. "오늘은 이만 가겠어요. 하지만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도윤의 대답에, 임설화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한 적의도, 완전한 경멸도 아닌 애매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저택을 떠났다. 시녀들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담장 너머의 그림자도, 조용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혼자 남은 이도윤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는 옷소매 속으로 감췄다. '긴장했군. 저 여자, 생각보다 훨씬 예민해.'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관찰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자존심 싸움처럼 보였지만, 그 눈빛 속엔 뭔가를 재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담장 너머의 기척. 그것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설유란이었나. 대전에서 나를 눈여겨보던 그 시선.' 그는 방으로 돌아와 다시 붓을 쥐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대치가 남긴 긴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손끝에 서린 미세한 떨림이 붓끝까지 전해져, 첫 글자를 쓰는 데도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대로 계속 숨어 지낼 수는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미 나에게 모이고 있어.' 대전에서의 발언, 오늘의 거절. 두 가지 사건이 겹치며 그를 향한 시선의 밀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관심이든 경계든, 어느 쪽이든 그에게 유리하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날 밤, 그는 늦게까지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갔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풀벌레 소리가 낮게 깔리고, 방 안의 유일한 빛은 흔들리는 촛불 하나뿐이었다. 서령의 기운이 조금씩, 조금씩 몸속에 쌓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붓을 쥔 손끝에서 시작된 온기가 손목을 지나 팔뚝으로, 다시 가슴께로 스며드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기운의 흐름이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답답함이 있었다. 흐름이 특정한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마치 좁은 병목을 통과하려는 물줄기처럼. '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다시 써보았다. 감정을 더 깊이 끌어올리고, 기억 속 문장을 더 정교하게 되살려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종이 위의 글자가 희미하게 빛을 내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벽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촛불이 미세하게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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