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 혼사 무르겠습니다

2화

대전 안의 정적은 길지 않았다. 예관이 당황한 얼굴로 혼약서를 든 채 이강철을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시선이었다. 이강철은 잠시 침묵하다,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아라." 이도윤은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붉은 융단 위로 늘어선 가문의 문양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좌우로 갈라져 앉은 대신들의 옷깃 소리까지도.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앉아 있던 것처럼,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 몸이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익숙해지는 걸까.' 가슴 한복판에서 낮게 맥동하는 두 개의 감각—검령과 서령—이 여전히 이물스러웠다. 하지만 그 이물감 위로, 눈앞의 상황을 읽어내는 냉정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 순간에는 그것이 더 필요했다. 그는 짧게 숨을 고른 뒤, 임설화를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임 소저."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은 이 혼약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임설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붉은 예복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래서요?" "저 역시 원치 않습니다." 대전 안에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좌측에 앉은 노대신 하나가 헛기침을 삼켰고, 우측의 부인들 몇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신랑이 스스로 혼약을 거부하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이 자리에서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도윤아!" 이강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졌다. 이도윤은 아버지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그의 눈빛에 담긴 것은 반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가늠하는,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지금 완전히 거부하면 아버지가 궁지에 몰린다. 임가와의 관계도 끊긴다. 이 자리에서 판을 뒤집을 필요는 없어. 다만···'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여러 갈래의 결말이 그려졌다. 완전한 거부는 아버지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킨다. 완전한 수락은 임설화의 반발을 더 키운다. 그 사이, 아주 좁은 틈이 있었다. "다만." 이도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완전히 결정짓기엔 너무 이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맺어지는 혼약이란, 두 가문 모두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그것은 절묘한 화법이었다. 거부도 아니고, 수락도 아닌. 판단을 유보하는 말. 대전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의 정적은 앞서와는 결이 달랐다. 당혹이 아니라, 헤아림의 정적이었다. 임재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딸의 반발과 이강철의 압박, 그 사이에서 숨 쉴 틈을 얻은 것이다. 그는 옆에 앉은 부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얼굴에도 옅은 안도가 스쳤다. 이강철 역시 미묘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예정된 순서를 흐트러뜨린 것은 분노할 일이었으나, 동시에 그는 낯선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 그동안 이도윤은 말수가 적고, 사람들 앞에서 늘 시선을 피하던 아이였다. 연회 자리에서도 구석에 서서 술잔만 만지작거리던 아들이었다. 오늘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목소리의 높낮이, 시선을 놓지 않는 방식, 말과 말 사이의 간격까지도. 단상 뒤편, 설유란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선 세 검객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벽에 새겨진 조각상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흥미롭군." 설유란이 낮게 중얼거렸다. "폐물이라 불리던 아이가, 저런 화법을 구사하다니." 청영문의 검객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부님, 저 아이를 살펴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설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도윤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어깨와 손끝, 호흡의 리듬을 훑고 있었다. 검을 쥐어본 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눈이었다. 그날의 혼약식은 결국 완전한 성사도, 완전한 결렬도 아닌 채로 마무리되었다. 혼약은 '유보'되었고, 이강철과 임재호는 삼 개월 뒤 열릴 가문 무술대회를 기점으로 다시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예관이 붉은 서신을 서둘러 접어 넣었고, 대전을 채웠던 팽팽한 공기도 조금씩 흩어졌다. 대전을 빠져나오는 이강철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아들을 조용히 데리고 별채로 향했다. 발밑에 깔린 돌바닥에서 저녁 냉기가 스며 올라왔다. "도윤아." 사람이 없는 복도에서, 그가 낮게 물었다. "오늘 대체 무슨 생각이었느냐." 이도윤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은 주름, 지친 눈빛. 그 안에 서린 것은 화가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등불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아버지의 얼굴을 더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정말로 절박하구나.' "아버지." 이도윤이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늘 제 자신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강철의 눈이 커졌다. "달라졌다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저를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지금 처하신 상황을 제가 돕고 싶습니다." 이강철은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오랫동안 아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흐릿하지 않은, 또렷한 눈빛. 그러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알겠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어떤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 희망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어깨에 얹힌 짐이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사실 이강철의 처지는 겉보기보다 훨씬 위태로웠다. 대장로 이씨 일가—특히 조카 이현우—가 최근 몇 년간 세력을 급속히 키우고 있었다. 대장로는 노골적으로 성주 자리를 넘겨다보았고, 이현우는 적천성 일대에서 이미 청하성의 미래 성주로 불리고 있었다. 무술대회에서 이현우가 우승이라도 한다면, 그 명성은 더욱 굳어질 터였다. 임가와의 혼약은 그저 딸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다. 임재호가 이끄는 소규모 세력이라도, 이강철의 편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 끈을 놓칠 수 없었다. 대장로 쪽 사람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는 지금, 임가마저 잃는다면 이강철의 자리는 삼 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가문의 명예도, 성주 자리도, 모두 흔들리고 있다.' 이강철은 별채를 나서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새어 나왔다가, 다시 어둠에 묻혔다. 한편, 이도윤은 방으로 돌아와 홀로 앉았다. 몸속에서 여전히 낯선 두 감각—검령과 서령—이 조용히 맥동하고 있었다. 하나는 차갑고 날카로운 결을 지녔고, 다른 하나는 은근하고 뜨거운 결을 지녔다. 두 기운은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하나의 흐름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검생이면서 서생이라니. 이런 설정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작은 몸집의 소녀가 뛰어들어왔다. 이서윤. 이도윤의 여동생이었다. 창백한 얼굴빛에, 숨이 조금 가빴다. 문턱을 넘어서다 살짝 휘청거렸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 세웠다. "콜록, 콜록··· 오빠, 혼약식 어땠어? 다들 그러던데, 오빠가 갑자기 멋있어졌다고···" 이도윤은 순간 멈칫했다. 이 아이가 원래 이도윤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핏줄로 이어진, 이 세계에서 그가 지켜야 할 가장 가까운 존재. '이 아이도··· 지켜야 할 사람이구나.' "서윤아."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많이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했잖아." "헤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이서윤이 침대 옆에 걸터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작은 어깨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유난히 힘겨워 보였다. 그 모습에, 이도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오빠 표정이 왜 그래?" 이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괜찮아. 진짜야." "괜찮다는 말은 아플 때 하는 말이 아니야." 이서윤이 입술을 삐죽였다. "오빠는 요즘 좀 이상해. 말투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근데··· 싫지 않아. 왜냐면 오빠가 더 오빠 같아졌으니까." 의원이 진단한 병명은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서윤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고의 의원들도 손을 쓰지 못했다. 이서윤이 잠든 밤이면, 이강철이 몰래 그 방 앞을 서성이다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하인들에게서 들은 적도 있었다. '이 세계의 의술로는 안 되는 병이다. 그럼···' 그때, 가슴 속에서 서령의 뜨거운 기운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아주 작은 진동이었지만, 분명한 반응이었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뜨는 듯한 느낌. 마치 무언가를 알리려는 듯이. 이도윤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서생의기로 이 아이를 구할 방법이···'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기운이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뚜렷한 목표 하나가 자리 잡았다. 이서윤이 콜록거리며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이도윤은 조용히 다짐했다. 방 안의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령의 기운이 다시 한번, 낮게 맥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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