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강찬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호국 사람이다.' 그는 확신했다. '아버지가 그리셨던 갑주 문양과 다르다. 저건... 남쪽 문양이다.'
산나물을 캐러 왔다가 마주친 것이었다. 열세 살, 남들 눈에는 그저 순박한 산골 아이일 뿐인 강찬이었다. 하나 그 조그마한 머릿속에서는, 팔백 년을 산 요괴의 혼이 서늘하게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
'허, 이거 참. 나물 좀 캐러 나온 것뿐이거늘, 어찌 이런 걸 만나는가.' 속으로 혀를 찼다. '겉모습은 아이 행세를 하고 있다지만, 이 몸이 시체 보는 눈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일지고.'
사내의 몸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얼핏 세어도 열일곱, 열여덟 군데는 넘을 상처들이 갑주 아래로 짐승의 발톱처럼 나 있었다.
한쪽 눈은 이미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다른 쪽 눈만이, 아직 세상을 향해 미약하게 열려 있었다.
강찬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도망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적국 장수를... 그냥 두고 가면 마을이 안전할지도.'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강찬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물주머니를 풀고 있었다.
'허어, 몸이 먼저 움직이는구나.' 강찬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마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갔다. '겉으로는 순진한 산골 아이 노릇을 하려 했건만... 아이의 몸에 든 것이 정이 많은 탓인가, 아니면 이 몸의 오래된 버릇인가.'
무릎을 꿇고 사내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쳤다. 갑주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럼에도 손끝은 떨리지 않았다.
물을 조금씩 흘려 넣자, 사내의 목젖이 힘겹게 움직였다.
"...아이..." 목소리는 갈라진 숨결에 가까웠다.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사람을 불러올게요."
강찬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사내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뜻밖의 힘이었다.
'허, 이 몸을 잡다니.' 강찬은 놀란 기색을 숨겼다. '죽어가는 몸에서 어찌 이런 힘이 나오는가. 사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이거늘.'
"소용... 없다." 사내가 말했다. "이미... 늦었다."
강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손아귀의 힘이 오히려 사내의 죽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는 것이었으니.
"내 말을... 들어라."
사내의 성한 눈이 강찬을 향했다. 그 눈빛에는 원한도, 두려움도 없었다. 다만 어떤 절박한 부탁만이 남아 있었다.
'저 눈빛...' 강찬의 속마음이 잠시 무거워졌다. '수백 년을 살며 죽음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거늘, 저런 눈은 볼 때마다 참으로... 무엇이라 해야 할지.'
사내는 가슴팍 갑주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안간힘을 썼다. 손가락이 갑주 틈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강찬이 대신 손을 넣어 도왔다.
손에 잡힌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옥으로 만든 구슬. 표면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 기운은...' 강찬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예사롭지 않다. 이 몸이 잠들어 있던 세월 동안에도 이런 기운을 지닌 물건은 드물었거늘.'
다른 하나는 청동으로 된 패였다. 짐승 형상이 새겨진, 묵직한 무게감이 있는 물건이었다. 손에 쥐자 그 무게가 팔목까지 전해졌다.
"이것을... 남산왕에게..."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남산왕이요? 그게 누구..."
강찬의 머릿속에서 요괴는 이미 여러 가지를 짚어보고 있었다. '남산왕이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나 이 사내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 이름이라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닐지고.'
"대호국 사람이다. ...대호국 사람만 믿어라. 대선국 사람에게는... 절대... 넘기지 말라..."
사내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장군님, 여기가 어딘지, 왜 이렇게 되셨는지..."
"...말할 시간이... 없다."
사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지막 숨이라는 것을, 강찬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사내의 몸이 잠시 떨렸다. 손끝이 강찬의 옷깃을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더듬었다.
"이 물건이... 발견되면... 너도... 위험해질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사내의 성한 눈이 서서히 감겼다.
숲은 조용했다. 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었다.
강찬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사내의 가슴이 더는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손을 뗐다.
'허어... 이렇게 또 하나가 가는구나.'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수백 년을 살아도 이런 순간은 익숙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인간이란 것들은 질기고도 여린 존재일지고.'
강찬은 손에 쥔 옥주와 영패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에서 옥주가 미약하게 서늘한 빛을 냈다.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이건... 예사 물건이 아니다.'
강찬은 옥주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문양이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빛깔을 바꾸는 것이, 단순한 옥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동패 역시 그러했다. 짐승 형상의 눈동자 부분에는 아주 작은 붉은 점이 박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이 스스로 미약하게 맥동하는 듯도 했다.
'이 몸의 오랜 눈으로 보아도... 처음 보는 종류로다.' 강찬의 속에서 요괴의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산왕이라, 대호국이라... 이 조그마한 산골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세상 참 넓고도 좁은 것이거늘.'
강찬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아직 이 상황을 정리하기도 전에, 저 아래 산기슭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아! 어디 있냐! 해 지기 전에 내려오랬잖아!"
마을 이장 덕구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두어 명의 목소리가 더 섞여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찾으러 나선 모양이었다.
강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죽은 대호국 장수의 시체와, 손에 쥔 옥주와 영패.
지금 저 목소리가 이곳까지 올라온다면 —
'이대로라면...' 강찬의 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적국 장수의 시체를 아이 손에 쥔 채로 발견된다면, 마을 전체가 어찌 될지 뻔하지 않은가. 전쟁 통에 이런 것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대선국이든 대호국이든 이 산골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거늘.'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발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찬은 순식간에 깨달았다.
'시간이 없다.'
강찬의 눈이 다급하게 주변을 훑었다. 시체를 숨길 곳, 혹은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사내의 갑주는 무겁고, 시체는 이미 굳어가고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강찬은 손에 쥔 옥주와 영패를 황급히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서늘한 기운이 품속에서 맴돌았다.
'덕구 아저씨가 여기까지 올라오기 전에... 어찌해야 한다.'
그 순간, 나뭇잎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