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선국 황궁, 편전의 새벽은 늘 같은 색이었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미처 걷히기도 전, 재상 한도겸은 이미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촛불 하나가 그의 얼굴 반쪽만 밝혔고, 나머지 반쪽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그 그림자 진 얼굴이 오히려 더 그다웠다.
서른일곱, 대선국 역사상 최연소 재상. 경제와 군사와 정치, 그 세 개의 실을 한 손에 쥔 사내였다. 손끝 하나로 조정의 인사가 뒤집히고, 그의 눈짓 하나에 지방 수령의 목이 달아나는 세상이었다.
붓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글자는 단정했고, 필압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뜨는군.' 그는 붓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해가 뜨는 것도, 짐이 명을 내리는 것도, 결국 순리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으니.'
창밖으로 아직 별이 몇 점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별도 저렇게 오래 떠 있다가 결국 스러지거늘. 하물며 사람의 권세야 오죽할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허나 스러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밝게 타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딱 정해진 보폭이었다. 오랜 세월 궁을 드나든 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재상 대인, 좌사마 조병만 대인과 좌영위 노태산 장군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렸다. 살찐 몸을 실룩이며 들어서는 조병만이 먼저 허리를 굽혔다. 이마에는 벌써 땀이 배어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저렇게 진땀을 흘리는 것은 몸이 무거워서인지,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재상 대인,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했소." 한도겸은 대답 없이도 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병만의 뒤를 따라 들어온 노태산은 갑주를 반쯤 걸친 채였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도 눈치는 빤히 살피는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수색마의 배치는 끝났습니다." 노태산이 두루마리를 서안 위에 펼치며 말했다. "동궁 인근 사방 삼 리,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지나가게 해두었지요. 순찰조는 반 시각마다 교대하고, 야간에는 횃불을 든 자만 통과시킵니다."
"잘했소." 한도겸은 짧게 답하며 붓끝을 매만졌다.
'수색마라... 이름부터 요란한 것들.' 그는 속으로 웃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을 옥죄는 데는 그럴싸한 이름보다 좋은 게 없지. 겁이란 놈은 실체보다 소문에서 자라나거늘.'
조병만이 눈치를 살피며 슬쩍 웃었다. "폐하께서 요즘 잠을 못 이루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럴 만하지요." 한도겸이 태연히 대꾸했다. "용상이란 자리가 원래 그런 것 아니겠소. 무거운 자리엔 무거운 근심이 따르는 법."
"허허, 재상 대인께서는 참으로 폐하를 위하시는군요." 조병만이 능글맞게 덧붙였다. 그 말투에는 아부와 조롱이 반씩 섞여 있었다.
한도겸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람은 그 침묵 속에 담긴 냉소를 느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캐물어 좋을 게 없다는 것쯤 눈치가 있었으니.
"그리고 하나 더." 노태산이 목소리를 낮췄다. "북쪽 국경에서 대호국 세작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움직인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궁의 경계를 강화하는 데 쓸 수 있겠지요."
한도겸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쓸 수 있겠소." 그가 말했다. "아니, 써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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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각 뒤, 소년 황제 이선이 편전에 들었다.
열세 살, 아직 앳된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곤룡포조차 그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걸음마저 무거워, 마치 등에 산을 짊어진 사람 같았다.
"재상." 이선이 힘없이 불렀다.
"폐하." 한도겸이 고개를 숙였다. 각도까지 정확한, 흠잡을 데 없는 예였다.
이선은 잠시 그 정확함이 낯설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안 옆에 놓인 찻잔에서 김이 오르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어젯밤..." 이선이 말을 삼켰다. "동궁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오. 궁인들이 겁에 질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웠다던데."
"수색마 무리 중 하나가 대호국의 세작을 뒤쫓느라 소란이 있었던 듯합니다." 한도겸이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답했다. "폐하의 안위를 위한 조치였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세작이... 궁 안까지 들어왔단 말이오?" 이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행히 담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한도겸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위로처럼 보였으나, 실은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하오나 그런 자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폐하이시니,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지요."
'세작이라니. 애초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없는 위협을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 아니겠는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거늘.'
이선은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반박할 근거도, 그럴 용기도 그에게는 없었다.
"짐이... 그럼 어찌해야 하오?" 이선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답을 구걸하는 기색이 짙었다.
"폐하께서는 그저 편히 침수에 드시면 됩니다." 한도겸이 대답했다. "나머지는 신이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얹혔다.
한도겸은 그 표정을 눈에 담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다. 아직도 그 두려움이 살아있으니, 부리기엔 딱 좋은 상태이거늘.'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두려운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는 다스리기 쉽다. 폐하께서는 그 이치를 몸으로 증명해 주시는구나.'
이선이 물러가자, 편전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도겸은 붓을 들어 다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의 필체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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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대선국 변경 평안촌.
전쟁이 삼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계절이 바뀌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봄이 오면 밭을 갈고, 겨울이 오면 곡간을 걸어 잠그고, 그리고 언제든 관에서 징집령이 내려오면 아들을 내보내는 것.
강찬의 아버지도 삼 년 전 그렇게 나갔다.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마을 어귀에서 손을 흔들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강찬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열세 살 강찬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것이 《천자문》이라는 사실을 늘 곱씹었다. 낡은 책장은 손끝이 닳아 반들거렸고, 몇몇 글자는 물이 스며 흐릿했다.
마을에서 글을 아는 아이는 그뿐이었다. 그 사실이 자랑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저 쓸쓸했다.
"찬아, 나무하러 간다며?" 어머니가 물었다. 손에는 아침에 지은 감자 몇 알이 들려 있었다.
"네,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강찬은 감자를 받아 품에 넣으며 웃었다.
"조심해. 요즘 산에 늑대가 자주 보인다더라."
"걱정 마세요. 저 발 빠르잖아요."
강찬은 지게를 지고 산길로 올랐다. 걸음이 가벼웠다. 몸이 가벼운 것과는 별개로, 머리는 늘 바쁘게 굴러갔다.
'오늘은 마른 가지가 많을 테지. 저 골짜기 쪽으로 가야 하나.' 그는 계산했다. '아니, 어제 비가 좀 왔으니 습기가 남았을지도. 산 능선 쪽이 낫겠어. 거긴 해가 잘 들어서 마를 테니까.'
산길은 어제 내린 비로 아직 축축했다. 발밑에서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그의 어깨 위로 얼룩덜룩한 무늬를 그렸다.
'오늘 지게 하나 가득 채우면, 며칠은 불 걱정 없겠지.' 강찬은 속으로 셈을 놓았다. '남는 건 저 아랫마을 김씨 아저씨한테 조 몇 되랑 바꿔야겠다.'
그렇게 계산하며 능선을 오르던 그의 발이, 문득 멈췄다.
비릿한 냄새.
바람을 타고 스며든 그 냄새는, 강찬이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피 냄새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가 흙바닥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찬은 지게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심장이 목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걸음마다 마른 나뭇가지가 발밑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숲의 그늘 속, 커다란 형체 하나가 나무뿌리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갑주는 절반쯤 찢어졌고, 몸 곳곳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팔뚝만 해도 강찬의 허벅지만큼 두꺼웠고, 어깨는 산처럼 넓었다.
강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대선국 갑주가 아니다.'
그가 아는 대선국 병사의 갑주는 검은 바탕에 붉은 문양이었다. 그런데 이 갑주는 낯선 색과 낯선 문양으로 덮여 있었다. 대체 어디서 온 자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적국의 병사인가. 아니면...'
강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도망쳐야 하는 건지, 도와야 하는 건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쓰러진 사내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