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믿지 않는 자의 성경

5화

숲을 헤치고 나가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안내구가 그냥 정보 하나 던져줬을 뿐인데, 왜 나는 그걸 무시하지 못하는 거지. 발밑에서 마른 가지가 계속 부러졌다. 바스락, 바스락.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게, 마치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 계산 안 하고 나온 사람처럼 죄지은 기분이었다. 아니 왜 내가 여기서 도둑놈 심정을 느껴야 하는데. [야고보서 1:27,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야고보야, 나 무신론자라니까. 근데 이 상황에서 이 구절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마 어릴 때 주일학교 다닌 기억이 뇌 어딘가에 박혀있었나 보다. 그때는 헌금 봉투에 백 원짜리 동전 몇 개 넣고 도넛 받아먹던 게 신앙생활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갑자기 이세계 와서 성경 구절이 자동완성되고 있다. 인생 참 알 수가 없다. 500미터쯤 걸었을까, 나무 사이로 화려한 저택이 보였다. 청현대륙의 건축물이라는 게 뭔지 처음 보는 거였는데, 마치 고급 사극 세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지붕은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뻗어있었고, 기둥마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거 하나 짓는데 얼마나 들었을까, 세속적인 생각이 먼저 든 걸 보면 나는 아직 이 세계에 적응 못한 게 확실했다. 드라마 세트장이면 다음 씬 찍기 전에 스텝들이 지나다니면서 소품 정리라도 할 텐데, 여긴 그런 인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진짜였다. 이게 진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게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 저택 뒤편, 정원 한구석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심장이 벌써부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첩보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화려한 자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 앞에 다른 남자가 무릎 꿇려져 있었는데, 옷이 여러 군데 찢어져 있었고 얼굴이며 팔에 상처가 가득했다. 자색 옷을 입은 쪽은 딱 봐도 귀족 태가 났다. 서 있는 자세부터 다르달까. 반면 무릎 꿇린 쪽은, 옷차림은 비슷하게 고급스러운데도 어딘가 초라해 보였다. 같은 재질의 천을 입어도 몸에 밴 위축감은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서다온, 네가 아직도 나에게 대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자색 옷의 남자, 이 사람이 나중에 알게 된 서하람이었다. 그가 검을 무릎 꿇은 남자의 어깨에 살짝 갖다 대며 말했다. 목소리에 짜증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실려있지 않다는 게 더 소름 돋았다. 그냥 벌레 한 마리 치우는 듯한 말투였다. "...형님, 저는 대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무릎 꿇린 남자, 서다온의 목소리는 힘없었지만 어딘가 눌러 참는 기색이 느껴졌다. "생각이 없었다고?" 서하람이 낮게 웃었다. "그럼 어제 원로회 앞에서 내 이름을 언급한 건 뭐지?"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자원 분배 문제에 대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하람의 검이 서다온의 팔을 그었다. 촤악! "으아악!" 서다온의 비명이 정원에 울렸다. 피가 옷을 붉게 적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거 실제 상황이잖아. 영화도 아니고,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지금 진짜로 사람이 다치고 있는 거잖아. 피가 저렇게 진하게, 저렇게 많이 나오는 걸 실제로 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봤는데 없었다. 급식실에서 손가락 베인 정도가 내 인생 최대 출혈 경험이었는데, 지금 눈앞에서는 사람 팔에서 콸콸 흐르고 있었다. [욥기 21: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욥기 형님, 지금 딱 그 심정이신데요.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성경은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나한테 이런 구절들만 던져주는 걸까. 위로가 되기는 하는데, 동시에 아무 도움도 안 됐다. "악인이 왜 잘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성경에 있었으면 인류가 벌써 그거 갖고 논문 몇백 편은 썼을 텐데. 서하람이 검을 거두며 차갑게 말했다. "사실이라는 걸 누가 증명해주지? 원로회는 증거를 원하지, 정의를 원하는 게 아니다." "..." 서다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상처 부위를 다른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똑, 똑. 그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넌 그저 이 가문의 부끄러운 짐일 뿐이야. 천재였던 그 시절이 지나고 지금 넌 무공자 1중 수준밖에 안 되지 않나." 서하람의 목소리에 조롱이 섞였다. "그런 자가 감히 자원 분배에 대해 입을 놀리다니." 무공자 1중이라는 게 뭔지 몰랐지만, 서하람의 말투로 봐서는 상당히 낮은 등급인 듯했다. 아마 이 세계에서는 능력치로 사람 서열을 매기는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직급으로 사람 갈구는 거랑 비슷한 건가 싶었는데, 여긴 그게 훨씬 더 살벌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승진 못 하면 팔이 잘리는 회사라니, 산업재해 신고할 노동청도 없을 것 같았다. 서다온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슬픔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형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서하람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 무너진 거겠지." 거짓말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서다온의 표정이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제 피혼 상대를 마음대로 정하고, 제 몫의 영약을 착복한 게 형님 아니었습니까!" 서다온이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피혼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다. 결혼 비슷한 거려나. 지금 상황에 안 맞는 생각이었지만, 인간이라는 게 위기 상황에서도 엉뚱한 단어에 집중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서하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다시 웃음으로 바뀌었다. "증거 있나?" "..." "없으면 그냥 조용히 있어. 그게 네가 이 가문에서 계속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서하람이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이번엔 목표가 더 명확했다. 검끝이 서다온의 목 쪼가리를 향했다. 아, 저건 진짜 죽인다는 거다. 팔 그은 것과는 각도 자체가 달랐다. 나는 그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머리로는 "저건 남의 가정사야, 남의 나라 정치야, 끼어들면 안 돼" 하는 상식적인 문장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발은 그 문장들을 전혀 안 듣고 있었다. 뭐야 내 몸, 언제부터 이렇게 정의로웠어. "저기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생각해도 최악의 첫마디였다. 사람이 칼에 맞아 죽으려는 순간에 "저기요"라니, 편의점에서 물건 계산할 때나 쓸 법한 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서하람의 눈에 놀람과 짜증이 섞였다. 서다온의 눈에는 당혹감과 함께 뭔가 다른 감정, 아마도 아주 작은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도망칠 수 없게 됐다. 누군가 나를 저렇게 바라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누구냐, 너는." 서하람이 검을 나에게로 돌렸다. 검끝이 나를 향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게 진짜 사람을 벨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걸, 방금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확실히 도망칠 때인데, 왜 내 발이 안 움직이는 거지. 전도서 형님, 지금 이 타이밍이 진짜 딱 도망갈 때 맞잖아요. 근데 왜 성경은 나서라는 쪽으로만 계속 구절을 던져주는 건데. 나는 손에 든 성경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데, 여기서 도망치면 저 사람이 죽을 거라는 확신만은 분명했다. 그 확신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알 수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싶었다. "저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성경이 다시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손끝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감각이 올라왔다. 마치 핸드폰 배터리가 과충전될 때 느껴지는 열감 비슷한 것이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열기라고 해야 하나. 서하람의 눈빛이 그 빛을 보고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뭔가를 알아본 듯한, 탐욕이 섞인 눈빛이었다. 방금까지 사람 팔을 베던 그 눈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동생 죽이려던 마음은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린 모양이었다. "그거..." 서하람이 검을 내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 물건, 어디서 얻었지?" 갑자기 상황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함을 느끼며 뒷걸음질쳤다. 이 사람, 서다온을 학대하던 걸 멈춘 게 아니라 관심이 나한테로 옮겨온 것뿐이잖아. 동생 죽이는 것보다 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애 표정 같았다. 저 표정이 훨씬 더 무서웠다. 적어도 서다온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 맞았는데,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저 시선을 받고 있었다. 더 큰 위험이 시작되고 있다는 걸, 그 순간 온몸으로 직감했다. 서하람의 걸음이 한 발, 두 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걸음이 나에게 닿기 전에 뭔가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있었다. 성경은 또 무슨 구절을 던져줄 건데. 설마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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