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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요괴가 다시 형체를 갖췄다. 붉은 빛이 사람 크기의 형상을 이루며 우뚝 섰다. 눈이라고 생각했던 부위가 이번엔 확실히 보였다. 샛노란 두 개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방금 전까지 그냥 붉은 안개 덩어리였던 게 어떻게 저렇게 사람 형태를 갖추는 거지? 아니, 형태를 갖추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왜 하필 그 형태가 날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양새인 건데. 설마 나랑 눈싸움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저, 저기요..." 말이 안 나왔다.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 몸이 이렇게 정직하게 겁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치였다. 발바닥이 땅에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누가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공포영화 볼 때마다 "저럴 땐 그냥 도망치면 되잖아" 하고 혀를 찼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사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상 당해보니 도망친다는 선택지 자체가 뇌에서 로딩이 안 됐다. 도사가 그 사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함부로 노려서는 안 될 것을 노렸구나!" 손에서 다시 보라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그거 지금 노려본 게 나인데요. 제가 노린 게 아니라 저 요괴가 저를 노린 거 같은데요. 누가 누굴 노렸다는 건지 문법이 헷갈리는 순간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요괴는 이미 나를 향해 몸을 날린 뒤였다. 촤아아악! 뜨거운 압력이 코앞까지 밀려왔다. 피할 새도 없었다. 공기가 통째로 밀려오는 느낌이랄까, 마치 사우나 문을 열자마자 한증막 열기가 얼굴을 덮치는 그 순간을 백 배로 확대한 느낌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죽나? 이렇게 허무하게? 편의점 알바 잘리고 이틀 만에 이세계 끌려와서 요괴한테 뜯겨 죽는 게 내 인생의 결말이라니, 너무 성의 없는 시나리오 아닌가.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안 낚아, 못 낚아, 낚이는 건 나잖아 지금. 성경아, 이 타이밍에 굳이 물고기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냐.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격려사가 아니라 방탄복인데.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이 스스로 빛을 뿜었다. 번쩍! 눈앞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뭔가 얇은 막 같은 게 나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비눗방울 안에 들어간 것 같은 감촉이었다. 근데 비눗방울이 이렇게 단단할 리가 없잖아. 쾅! 요괴의 몸이 그 막에 부딪혀 그대로 튕겨나갔다. 마치 유리창에 부딪힌 새처럼, 아니 그보다는 자동문 센서 오작동으로 문에 정면으로 부딪힌 사람처럼 요란하게 튕겨 나갔다. 붉은 형상이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르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뭐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이해가 안 갔다. 방금 죽었어야 할 타이밍인데 안 죽었다. 이거 사기 아닌가. 아니, 사기라면 내가 당하는 쪽이어야 정상인데 왜 요괴가 튕겨 나가는 거지. [성경 4124호, 방어 프로토콜 자동 발동. 사용자 생명 위협 감지.] 대괄호 텍스트가 다시 눈앞에 떴다. 이번엔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안내 프로그램을 활성화합니다. 활성 시간 30분.] 성경이 다시 한번 빛을 내며 표지가 스르륵 열렸다. 책 속에서 작은 구체 같은 게 튀어나와 내 앞에 둥둥 떠올랐다. 크기는 탁구공만 했고 표면이 부드럽게 빛났다. 자세히 보니 표면에 아주 작은 글씨 같은 문양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는데, 무슨 글자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냥 예쁘게 반짝이는 구슬이라고 하면 딱 맞는 모양새였다. 장난감 뽑기 기계에서 나온 캡슐 안에 조명이라도 넣어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사용자님. 저는 성경 4124호의 지능형 안내 프로그램입니다.] 목소리는 여성 같으면서도 기계적이었다. 뭔가 대형마트 안내 로봇 느낌이랄까. 아니면 은행 앱 챗봇이 갑자기 목소리를 갖게 된 느낌.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바로 이어질 것 같은 어투였다. "...너 뭔데." [설명 시간이 부족합니다. 위협이 근처에 있습니다. 우선 방어 태세를 유지하겠습니다.] 안내구는 그 말을 하면서도 요괴 쪽을 향해 뭔가 스캔하는 듯한 빛을 뿜었다. 빛이 요괴를 위아래로 훑을 때마다 삐빅, 삐빅 하는 전자음이 났다. 편의점 바코드 찍는 소리랑 똑같아서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상황에 웃길 정신이 남아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요괴는 튕겨난 충격에서 회복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붉은 안개가 잠깐 형체를 잃었다가 다시 응축되는 걸 보니,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게 분명했다. 샛노란 눈동자 두 개가 다시 또렷하게 떠올랐다. 저 눈, 진짜 계속 보고 있으니까 소름 돋는다. 그 사이 도사가 재빨리 다가와 나와 요괴 사이에 몸을 던졌다. "이 요물, 오늘 여기서 끝을 보리라!" 도사의 손끝에서 보라빛 검이 형성되었다. 실체가 있는 검이 아니라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었는데, 그게 요괴의 몸을 그대로 갈랐다. 검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공기가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냈다. 과학적으로 설명 안 되는 현상인데 그냥 눈으로 보니까 믿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요괴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붉은 액체로 흩어졌다. 이번엔 완전히 흩어지지 못하고 일부가 그대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공기 중으로 스멀스멀 흩어지는 붉은 안개가 마치 탄 고기에서 나는 연기처럼 보였다. 비유가 이상하다는 건 나도 안다. 근데 진짜 그렇게 보였다. "끄에에에엑!"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남기고, 요괴의 잔해가 땅으로 스며들며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정적이 흘렀다. 숲속의 새소리마저 뚝 끊긴 것 같은 정적이었다. 방금까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자리에 이렇게 고요한 침묵이 찾아온다는 게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도사가 검을 거두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은가?" "네, 네... 아마도요." 목소리가 떨려서 대답이 제대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는데, 겨우 버텼다. 이 정도면 나름 잘 버틴 거 아닌가?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안내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반짝이는 구슬이 방금 내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났다. 안내구는 나를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사용자님, 활성 시간이 제한적이니 핵심 정보만 전달하겠습니다. 성경 4124호는 구현(具現) 능력을 지닌 고등급 아이템입니다.] "구현?" [사용자가 알고 있는 지식, 상상, 또는 기억을 물리적 실체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만 구현에는 가치점이라는 자원이 소모됩니다.] 가치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도사의 눈빛이 흠칫 변했다. "방금... 가치점이라 했는가?" 도사의 목소리가 낮고 진지해졌다. "그것은... 고대의 유물, 아니 상급 문명의 물건이 아닌가." 방금까지 검으로 요괴를 갈라버리던 그 위엄 있던 도사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순수한 학구열이라기보단 딱 봐도 탐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성경을 슬쩍 몸 뒤로 숨겼다. [정정합니다. 이 물건의 출처에 대한 정보는 사용자에게만 개방됩니다.] 안내구가 딱 자르듯 대답했다. 뭐야, 이 프로그램 은근 텃세 부리네. 그래도 지금은 그 텃세가 고마웠다. 누구한테 뭐 뜯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니까. 도사는 잠시 나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겠지. 다만..."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자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는가?" "청현대륙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조심해야 할 것이네. 이곳은 힘이 곧 법이 되는 땅이야." 도사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런 물건을 지녔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네는 곧 표적이 될 것이네." 표적이라니.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그냥 무서울 때였다. 때를 좀 가려서 오라고, 이 구절아. 아니 그리고 애초에 표적이 될 물건이면 나한테 왜 준 거야. 이거 완전 로또 당첨금 받자마자 동네방네 소문나서 강도 당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건데. 도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몸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허공을 걷는 듯한 발걸음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지워졌다. 저 양반, 이름도 안 알려주고 가네. 은인인데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밥이라도 사야 하나, 아니 여기 화폐 개념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안내구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용자님, 남은 활성 시간은 24분입니다. 지금부터 가치점 시스템과 구현 능력의 기본 규칙을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 살면서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도 없었을 테니, 이제부터는 그냥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하필 24분이라는 애매한 숫자를 남긴 건지. 30분이면 30분, 20분이면 20분이지, 24분은 무슨 기준으로 나온 시간인 건지 궁금했다. 설마 이 프로그램도 방금 요괴랑 싸우느라 6분을 잡아먹은 건가. [먼저, 사용자님의 현재 가치점 잔량을 확인하겠습니다.] 안내구의 표면에서 다시 빛이 흘러나오며 작은 숫자 같은 게 허공에 떠올랐다.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저절로 낮게 신음을 흘렸다. 아, 이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구나. 가치점이 뭔지, 얼마나 있는지, 뭘 해야 늘어나는지, 그 어떤 것도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다. 이 숫자가 앞으로 내 목숨줄이 될 거라는 확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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