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강태호는 늘 그렇듯 먹을 것을 들고 나타났다.
강도윤이 머무는 별채 뒤편, 사람 발길이 드문 대숲 사이 평상이었다.
댓잎 사이로 오후 햇살이 잘게 부서져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숲이 스스스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섞여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걸음이었다.
느긋하고 발을 끄는 듯한, 게으른 리듬.
"어이."
강태호가 손을 들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목함이 들려 있었다.
옻칠이 된 낡은 목함이었다. 뚜껑에는 강씨세가의 문장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거 먹어봐."
강도윤 앞에 목함을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금빛을 띠는 알약 몇 개가 들어 있었다.
크기는 작았다. 콩알만 했다.
향이 코끝을 스쳤다. 인삼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더 무겁고 단 냄새였다.
"뭔데 이게."
강도윤이 목함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영계 영양환. 우리 집에서 만든 거야."
강태호가 발복한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배가 나온 것치고는 걸음이 가벼운 남자였다.
"먹으면 기력이 돌아. 너 요즘 안색이 완전 시체 같아서."
"시체는 좀 심하지 않냐."
"진짜 그런데 뭘. 눈 밑에 그림자가 짙어."
강태호가 손가락으로 자기 눈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도윤은 목함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알약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았다.
빛을 받으면 은근하게 번쩍이는 그 금빛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고맙다."
"됐고. 그보다."
강태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살피는 눈치였다.
대숲 사이로 시선을 한 번 던지고, 다시 강도윤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흑요봉 얘기 들었어?"
강도윤의 심장이 순간 조여들었다.
목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얘기."
목소리를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렸다는 것을.
"거기 또 산사태 났었잖아. 근데 그 뒤로 이상한 소문이 돌아."
"어떤 소문."
"세가 창고에서 오래된 문서 하나가 사라졌대."
강태호가 목함을 다시 챙기며 자리에 앉았다.
평상 위에 걸터앉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우리 아버지가 관리부에 있어서 들은 얘긴데."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10년 전 산사태 기록 옆에 붙어 있던 별지가 하나 없어졌다더라."
"별지에 뭐가 있었는데."
"몰라. 근데 그 별지에 그려진 문양이, 세가 창시자 시절 유물에 새겨진 것과 같다는 얘기가 있어."
강도윤은 숨을 멈췄다.
대숲 소리가 갑자기 멀어진 것 같았다.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문양이라는 말에 팔뚝의 붉은 선이 다시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옷소매 안쪽, 살갗 아래 숨어 있는 그 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강도윤은 저도 모르게 소매를 손으로 눌렀다.
"어디 아파?"
강태호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떤 문양인데."
강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
강태호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흙바닥에 손끝이 파고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점 하나.
선 하나.
물결 모양.
그리고 작은 탑 모양.
"이런 식으로 생겼대. 점, 선, 물결, 탑."
강태호가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우리 아버지도 정확히는 못 봤다는데, 관리부에서 그 그림 모사한 걸 슬쩍 본 사람이 있대. 그 사람이 말한 게 딱 이런 모양이었다더라."
강도윤의 몸이 굳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웅—
울림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뼈 속으로, 핏줄을 타고, 심장까지 파고드는 진동이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낯선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불타는 성벽.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붉은 불티가 눈처럼 흩날렸다.
피 묻은 갑주.
누군가의 손이 그 갑주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외치는 소리.
절박하고, 격렬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절규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지는 같은 문양.
점. 선. 물결. 탑.
문양이 불꽃 속에서 타오르듯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릿해졌다.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발밑의 평상이 진짜로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야, 괜찮아?"
강태호의 목소리에 강도윤은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다시 대숲으로, 오후 햇살로, 평상으로 돌아왔다.
숨이 가빴다.
"어, 괜찮아."
"안색이 더 안 좋아졌는데."
강도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이마를 짚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지? 너 며칠 전부터 이상했어."
강태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걱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그 문양,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
강태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강도윤은 잠시 망설였다.
말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계산이 오갔다.
말했다가 어떻게 될지, 침묵했다가 또 어떻게 될지.
하지만 강태호는 지금까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준 유일한 또래였다.
세가 안에서 그를 순수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손에 꼽았고, 그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 앉아 있었다.
"흑요봉에서."
그가 낮게 말했다.
강태호의 눈이 커졌다.
"거기서 뭘 봤어?"
"시신."
강도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금빛 시신.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있었어. 만졌더니 이상한 게 몸에 남았어."
강태호의 얼굴이 굳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마저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진짜야?"
"진짜야."
"미친. 그게 언제야."
"얼마 안 됐어."
강도윤은 소매를 살짝 걷어 팔뚝을 보였다.
붉은 선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혈관처럼 가지를 뻗은 모양이었지만, 자연스러운 혈관과는 색이 달랐다.
강태호가 그것을 보고 숨을 삼켰다.
"이거…… 이거 뭐야."
"모르겠어."
"그 시신이 사라졌다는 별지 문양이랑 관련 있는 거야?"
"모르겠어. 근데 방금 네가 그린 그림 보고, 뭔가 봤어."
"봤다니, 뭘."
"장면 같은 거. 불타는 성벽. 갑주. 목소리."
강도윤이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직도 그 장면의 여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불꽃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강태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땅바닥에 그려놓은 그림을 손으로 슥슥 지웠다.
마치 그 그림 자체가 위험한 물건인 것처럼.
그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윤아."
"응."
"이거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문제 아닌 것 같아."
강도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로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지.
장로들은 결코 호의로 자신을 대해준 적이 없었다.
강도훈이나 강현빈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그 이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강도훈의 눈빛, 늘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 시선.
강현빈의 조용한 무관심, 그 무관심 뒤에 숨겨진 날카로움.
그들이 이 문양의 존재를, 이 시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일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강도윤이 말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려 애썼다.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처지인지."
"알아."
강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게, 천천히.
"내가 입 무거운 거 알잖아. 걱정 마."
"고맙다."
"근데 이거 하나만은 알아둬."
강태호가 목소리를 다시 낮췄다.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그 별지가 없어진 시점이, 딱 네가 흑요봉에서 시신 만난 시점이랑 맞물려."
강도윤의 눈이 커졌다.
손끝이 완전히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누군가 알고 있다는 거야?"
"모르지. 근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딱 맞아."
강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을 툭툭 털며, 다시 목함을 강도윤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꼭 먹어. 그리고 조심해."
"태호야."
"응?"
"고맙다. 진심으로."
강태호가 잠시 강도윤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가려 애쓰는 듯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이 남아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밥이나 잘 챙겨 먹어."
그가 자리를 떴다.
발소리가 대숲 사이로 사라져 갔다.
강도윤은 홀로 남아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댓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목함 위에서 반짝였다.
손안의 금빛 알약이 어쩐지 아까 본 그 시신의 빛깔과 닮아 있었다.
같은 색이었다. 같은 무게였다. 같은 온도였다.
강도윤은 알약 하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빛에 비춰보았다.
빛이 알약 속을 투과하며 은은하게 퍼졌다.
문득 그 빛 속에서, 다시 그 문양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점. 선. 물결. 탑.
강도윤은 급히 알약을 목함에 다시 넣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겨 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강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대숲을 흔들었다.
스스스, 소리가 낮게 퍼져 나갔다.
그 소리 속에 무언가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까 들었던 울림, 웅— 하는 그 소리가.
강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함을 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떨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아도, 대숲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