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역천대승

3화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강도윤은 훈련장 담벼락 아래 서 있었다. 돌담은 낮았다. 어른 키를 겨우 넘는 높이였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서열 상위권에게만 열리는 문이었다. 정확히는, 문 자체가 그를 막는 것이 아니라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막았다. 몇 번이나 다가섰다가 물러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등 뒤로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이제는 다가서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담 너머로 넘어오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 발이 땅을 밀어내는 소리. 가끔 터지는 웃음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기합 소리, 또 누군가를 향해 던지는 짧은 조언. 그 안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강도윤은 눈을 감고 그 소리들을 하나씩 구분해 보았다. 검을 다루는 방식만으로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짧고 날카롭게 끊어치는 소리는 상위 다섯 안에 드는 이의 것이었다. 무겁고 느리게 밀어붙이는 소리는 체격 좋은 신입의 것이었다. 그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들의 검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검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팔뚝이 가려웠다. 소매를 걷어 보았다. 붉은 선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어제보다 희미해진 듯도 했고, 그대로인 듯도 했다. 색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했다. 어제는 붉은빛이 선명했는데 오늘은 그 안에 옅은 자줏빛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아무 통증도 없었다. 다만 몸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한 번 지나갔다. 웅— 익숙해진 소리였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지금은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다만 몸 어딘가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감각이 남았다. 그것도 익숙해진 것인지, 그저 무뎌진 것인지 강도윤은 알 수 없었다. 소매를 다시 내렸다. 옷자락이 팔뚝을 덮는 순간에도 그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서 뭐 하냐." 강도훈의 목소리였다. 강도윤은 소매를 서둘러 내렸다. 이미 내린 소매를 한 번 더 눌러 정리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라니." 강도훈은 담벼락에 어깨를 기댔다. 훈련을 마치고 나온 듯이 이마에 땀이 살짝 남아 있었다. 숨은 고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옷깃의 금실 문양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어제 일은 생각해 봤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강도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표정에는 만족감과 함께, 미묘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예상했던 답을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착하네." 그는 허리에 찬 검의 자루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푸른빛이 도는 칼날이 칼집 속에서도 은은히 비쳤다. 그 검은 강도훈이 입문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가문의 상징이었다. 강도윤은 그 검을 볼 때마다 손끝이 저렸다. 한때는 자신도 그런 검을 가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근데 말이야." 강도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강도윤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뒤로 물러선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내가 침묵하라고 했지,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라고는 안 했어." 강도윤은 눈을 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곧 알게 돼." 강도훈은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몇몇이 따라붙었다. 훈련장 안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서열 상위권다운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그들은 강도윤을 지나칠 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강도윤을 향한 것이었다. 정확히 무엇이 웃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강도윤은 담벼락에 등을 붙인 채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강도훈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라고는 안 했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곱씹을수록 불안해졌다. 그날 오후, 식당 뒤편 그늘에서 강도윤은 낮은 발소리를 들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시간이었다. 식당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이 뒤편만은 조용했다. 그는 종종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바람이 지나간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뭇잎 몇 개가 발밑으로 굴러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다. 영력 고등급의 기운이 몸에서 은은히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마치 공기 자체를 눌러 내리는 듯한 압박감이 있었다. 강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굳는 것을 느꼈다. 강현빈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훈련장 안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조용한 인상이었다. 조용한데도 위압적이었다. 강도윤은 숨을 멈췄다. "오랜만이다." 강현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웃음기는 없었다. "기억하나. 예전에 네가 나를 가르쳤지." 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은 났다. 아주 오래전, 강도윤이 아직 서열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강현빈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배우는 자의 위치였다. 강도윤이 검을 쥐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던 몇 안 되는 후배들 중 하나였다. 그 시절이 이렇게 뒤바뀔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위였고 내가 아래였어." 강현빈이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가 없었다. 마치 땅을 밟지 않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아니지." 그의 눈이 강도윤의 팔뚝을 훑었다. 소매 아래 감춰진 것을 아는 눈빛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시선의 방향만은 분명했다. 강도윤은 저절로 팔을 몸 쪽으로 당겼다. 강도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굳어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았다. 이런 반응은 낯설지 않았다. 몸이 위험을 느낄 때마다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도훈이 말을 안 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강현빈이 나직이 말했다. "뭘 봤는지, 그것까지도." 강도윤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무엇을 봤다는 것인가. 강도훈이 정확히 무엇을 강현빈에게 전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제 일에 대해 말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 짐작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몸속에서 울림이 다시 지나갔다. 웅— 이번엔 좀 더 길었다. 마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반응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강도윤은 그 울림이 겉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숨을 참았다. 강현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감지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잠깐 강도윤의 팔뚝이 아닌, 그의 전신을 훑었다. 마치 공기 중에 떠도는 것을 감지하려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지웠다. "걱정할 것 없다." 그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이라는 말은." 강도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묻지 않으려 했지만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답을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강현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확신하게 되면 그때 다시 오겠다." 그렇게 그는 사라졌다. 그늘 속으로, 발소리조차 없이. 강도윤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늘의 각도가 바뀌는 것을 보고서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식당 앞을 지나던 몇몇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혼자 그늘 아래 서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한 문장뿐이었다. 확신하게 되면, 다시 오겠다. 무엇을 확신한다는 것인가. 그의 재생 능력을.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강도윤은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아래 감춰진 붉은 선이 다시 떠올랐다. 그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자신 외에는 없어야 했다. 강도훈이 우연히 보게 된 것은 실수였다. 그리고 그 실수가 이렇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팔뚝의 붉은 선이 다시 가려워졌다. 이번엔 눌러도 가라앉지 않았다. 강도윤은 소매를 걷고 다시 그 선을 바라보았다. 색이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착각이 자꾸만 확신처럼 느껴지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은 믿는 만큼만 본다. 하지만 강현빈은, 아직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강도윤은 그늘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등 뒤로 누군가의 시선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훈련장 쪽에서 다시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여전히 그와는 상관없는 세계의 소리였다. 하지만 오늘, 그 세계의 경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강도윤은 느꼈다. 강현빈이 확신하게 되는 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