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황보 공작가의 응접실 옆, 좁은 대기실이었다.
벽에는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창문으로는 정원의 일부가 비스듬히 보였다. 윤재는 그곳에서 견습 집사 후보 등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다가, 문득 그게 여섯 살짜리 몸이 하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멈췄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이십 년 넘도록 굳어진 버릇이 이 작은 몸에서도 그대로 튀어나왔다.
공작이 직접 나서서 그를 정식으로 저택에 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은 이미 하인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대기실 문틈으로 지나가는 하녀들의 말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공작님이 왜 저런 애를?" 하녀들이 소곤거렸다. "글쭈, 하고는. 이유가 있다잖아. 소하 아가씨가 저 애 아니면 밥도 안 먹겠다고 떼를 쓰신다지." "세상에, 겨우 여섯 살짜리가." "여섯 살이라서 더 무서운 거야. 그 나이에 벌써 그런 협박을 할 줄 안다는 게."
그야말로 별명이 아깝지 않은 성격이었다. 여섯 살짜리가 부모를 상대로 그런 협박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지만, 윤재는 이미 그 협박의 위력을 옆에서 목격한 뒤였다. 소하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식탁을 뒤집어엎던 장면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어린애답지 않은 결단력이었다.
그가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그 기억의 파편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황금의 왕관.' 전생에 그가 밤을 새워 플레이했던 게임의 제목이었다. 그 게임 속 세계관은 대현제국을 배경으로, 왕자들과 귀족 영애들 사이의 사랑과 권력 다툼을 그린 연애 시뮬레이션이었다. 정확히는 히로인이 여러 남자 주인공들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 이야기였고, 그 히로인의 이름이 유서연이었다. 캐릭터 디자인부터 시나리오까지 꽤 공들여 만든 게임이었다는 걸 윤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게임에는 '악역 영애'라는 클리셰적인 조연이 존재했다.
황보소하.
***
윤재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마치 물에 젖은 종이처럼 어떤 장면은 선명했고, 어떤 장면은 흐릿하게 뭉개져 있었다.
선명한 것들은 대체로 결정적인 장면들이었다. 소하가 히로인을 괴롭히다 들통나는 장면. 왕궁의 재판정. 그리고 처형대. 그 처형대 위에서 소하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그것까지도 윤재는 또렷하게 기억했다. 억울함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텅 빈 얼굴이었다.
흐릿한 것들은 대부분 그 사이의 과정이었다. 왜 소하가 그렇게 뒤틀린 성격이 되었는지, 정확히 몇 살 때 무슨 사건을 겪었는지, 그런 세세한 사정들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도 몇 줄 안 되는 대사로 스쳐 지나갔던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그때 스킵 버튼을 너무 자주 눌렀던 걸지도.
'이래서야 예지몽이라고 할 것도 없잖아.'
윤재는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완전한 미래 지식이 있다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을 텐데, 그가 가진 건 뒤죽박죽 섞인 조각들뿐이었다. 마치 누군가 게임 스크립트를 찢어서 반쯤만 던져 준 것 같았다. 그것도 순서를 뒤섞어서.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소하는 죽는다. 처형당한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그 사실 하나만은 어떤 안개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것만은 잊지 말라고 누군가 못을 박아둔 것처럼.
***
윤재는 그날 밤 정원에서 소하가 자신을 붙잡던 순간을 떠올렸다.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그 힘에 실린 절박함이 여섯 살짜리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는 것도.
'이 아이가 나를 자기 것이라고 했지.'
그 말은 단순한 억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하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언젠가 혼자 남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등이 서늘해졌다. 어린아이의 직감이란 때로 어른의 통찰보다 정확한 법이니까.
공작이 그를 거둔 것도, 자신이 게임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했다. 마치 누군가 이 자리에 그를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신이 있다면 지독한 취미를 가진 게 분명했다. 하필 이 시기에, 하필 이 몸으로, 하필 이 저택 앞에.
윤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섯 살짜리의 작은 손이었다. 손가락은 짧고 통통했으며, 손톱 밑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흙때가 남아 있었다.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분도 없고 힘도 없는 아이가, 미래에 처형당할 공작가의 영애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검을 들 수도 없고, 정치를 논할 수도 없고, 심지어 글씨조차 아직 서투른 이 몸으로.
그런데도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구해야 해.'
단순히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 마음은 다른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건 윤재가 전생에서도 견디지 못했던 일이었다. 화면 너머로 캐릭터가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과, 지금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아이가 그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걸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무게였다.
***
"강윤재." 문이 열리며 집사장이 그를 불렀다. 나이 든 남자였고, 얼굴에는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목소리마저 감정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처럼 평평했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를 다시 만졌다. 소매를 잡아당겨 구김을 펴고, 옷깃을 바로 세우고. 여섯 살 아이가 하기엔 지나치게 신중한 몸짓이었고, 집사장은 그 모습을 잠깐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가 아무 말 없이 앞장서 걸었다.
집사장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그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복도의 대리석 바닥이 발밑에서 차갑게 울렸고, 걸음마다 자신의 결심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이 저택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자신의 목표는 단 하나로 고정될 것이다.
황보소하를 처형대에서 끌어내리는 것.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쪽에서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윤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문을 밀었다. 손잡이는 차가웠고, 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 순간 그는 아직 몰랐다. 그 방에서 나눈 몇 마디 대화가, 자신을 이 저택의 정식 견습 집사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나가 함께 튀어나올 것이라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