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겨울 저택의 온기

5화

다음 날 아침, 저택 전체에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쯤 주방에서부터 빵 굽는 냄새가 복도까지 스며들어 하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을 텐데, 오늘은 다들 어딘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발끝을 세우고 다녔다. 집사가 아침 일찍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본 하녀들이 수군거렸고, 그 수군거림은 순식간에 부엌까지 퍼져 이서연의 귀에까지 닿았다. "무슨 서신이 왔다는데, 공작님 표정이 심상치 않으셨대요." 주방 보조로 일하는 어린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였을 때, 이서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반죽을 마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문들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가버릴 테니까. 하지만 정오가 되기 전, 그녀는 직접 조하준의 부름을 받고 서재로 향하면서 그 소문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하준은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만으로도 평소와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어깨는 늘 그렇듯 곧았지만, 손끝으로 서신을 접었다 펴는 동작이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님, 무슨 일이……"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겨울 숲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서연은 그 안에 담긴 것이 단순한 업무적 긴장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명화국의 왕자 일행이 방문할 예정이오." 그 말에 이서연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왕자 일행이라니, 그것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그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 정윤호 왕자님이……, 왜 이곳에?" "국경 지역 순시를 겸한 외교 방문이라 들었소. 설한국과 명화국 사이의 무역 협정 때문이라는군. 국왕 전하께서 직접 이 저택에 손님을 맞으라 명하셨소." 조하준이 담담하게 설명했지만, 이서연의 귓가에는 이미 다른 소음이 울리고 있었다. 정윤호와 자신을 공개적으로 파혼시킨 그 웃음소리, 홀 전체를 채우던 귀족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그 곁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던 한소이의 얼굴이. 손끝이 저절로 차가워지고, 목덜미까지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이 낯선 나라에서, 하필이면 자신이 요리사로 일하는 이 저택에서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애써 다잡아둔 마음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괜찮소?" 조하준이 문득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몇 걸음 다가온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 담긴 조심스러움이 이서연의 마음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요." "낯빛이 하얗게 질렸는데 그것을 놀란 정도라 하기엔 무리가 있소." 그의 지적에 이서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 남자는 참, 위로하는 방식이 늘 이런 식이었다. 다정한 말 한마디보다 정확한 관찰이 먼저 나오는 사람. "싫다면, 방문 기간 동안 다른 곳에 머물게 해줄 수도 있소. 별채를 비워두거나, 아니면 영지 내 다른 저택으로 옮기는 것도 어렵지 않소." 그 제안에 이서연은 잠시 흔들렸다. 열흘 뒤면 이 저택 어딘가에서 정윤호와 스치듯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듯 숨는다면, 그것은 또다시 자신이 그들에게 진 것이 되는 셈이니까. 이미 한 번, 사교계 전체가 보는 앞에서 무너졌던 자신이었다. 두 번째까지 그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아니요. 제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조하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걱정인지 신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서연은 왜인지 그 시선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가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창가로 다시 돌아섰을 때, 이서연은 조용히 서재를 나섰다. * * * 방문 예정일까지는 열흘이 남아 있었고, 그동안 저택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해졌다. 하인들은 은식기를 꺼내 광을 내고, 정원사들은 시든 화단을 정리하며 새로 얼음꽃을 심었다. 이서연은 겉으로는 평온하게 메뉴를 짜고 재료를 준비했다. 명화국의 왕자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문득 정윤호가 매운 음식을 유난히 못 먹는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순간에도 그런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씁쓸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종종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사교계 전체가 지켜보는 앞에서 파혼을 당했던 그 순간, 정윤호의 냉랭한 시선, 그리고 한소이의 승리감에 찬 미소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에 이서연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한참을 뒤척였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손끝은 이불 속에서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몸을 움직여야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촛불 하나만 밝혀둔 주방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은은한 어둠 속에서 향신료 병들이 조용히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밀가루를 꺼내 반죽을 치대고, 냄비를 씻고, 낯선 향신료의 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손목이 뻐근해질 때쯤, 그제야 머릿속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뭘 하시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서연은 놀라 돌아보았는데, 그곳에는 잠옷 위에 두꺼운 가운을 걸친 조하준이 서 있었다. 겨울 밤하늘 같은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달라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공, 공작님. 아직 안 자셨습니까." "복도를 지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소. 이 시간에 주방에서 불을 켜둘 사람이 그대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잠이 안 와서요." "왕자 때문이오?" 그 직설적인 물음에 이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밀가루가 묻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조하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식탁 앞에 앉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조용한 주방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무엇이든 만들어보시오. 나는 지켜보겠소." 그 말에 이서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결국 자신에게 요리를 시키는 것이라니, 어딘가 이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한 말 한마디 대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조하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는 것을, 이서연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럼……, 따뜻한 스튜라도 끓여볼까요." "좋소."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이서연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냄비에 물을 붓고 야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감자 껍질을 벗기는 손끝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사이, 조하준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는데, 그 시선이 부담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하게 든든했다. "열흘 뒤에 어떤 표정으로 그를 마주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서연이 문득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온 것에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은 주방의 조용한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간 뒤였다. "굳이 표정을 정해둘 필요는 없소. 그대는 그저 그대답게 있으면 될 뿐이오." 조하준의 대답은 짧았지만 단단했다. 이서연은 그 말을 곱씹으며 야채를 냄비에 넣고 불을 올렸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창밖의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열흘 뒤 다가올 재회가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는, 아직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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