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겨울 저택의 온기

4화

설한국에서의 나날이 쌓여갈수록, 이서연의 손끝은 점점 더 자연스럽게 재료를 다루게 되었다. 처음엔 밀가루 봉투 하나 뜯는 것도 서툴러서 온 주방을 하얗게 물들이곤 했는데, 이제는 반죽의 점도만 만져봐도 물을 더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왔다. 사람이 참 무섭다니까, 하고 그녀는 종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정말 이 세계에 눌러앉는 게 아닌가 싶어서. 조하준의 얼굴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겨울 밤하늘처럼 차갑던 그 눈동자가, 요즘은 이서연이 무언가 실수를 저질러도 예전처럼 딱딱하게 굳지 않았다. 대신 옅은 한숨을 내쉬거나, 손수 도와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이는 식으로 반응이 바뀌어 있었다. 그날도 저녁 준비를 위해 두 사람이 나란히 주방에 서 있었다. 화로 위에서는 국물이 끓는 소리가 나고, 창밖으로는 굵은 눈발이 조용히 쌓이고 있어서, 그 온도차가 주방 안을 묘하게 아늑하게 만들었다. 이서연은 반죽을 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옆에서 조하준이 어설프게 밀가루를 만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공작님, 그렇게 세게 누르시면 반죽이 다 찢어져요." "……그런가." 그가 뭐라 항변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이내 자신이 정말 반죽을 찢어놓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묵묵히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이서연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다 반죽을 미는 두 사람의 손이 겹치는 일이 벌어졌다. "어, 죄송……" "괜찮소."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손을 떼지 않은 채로 잠시 멈춰 있었다. 나무 도마 위에 놓인 반죽은 그새 미묘하게 식어가고 있었는데, 정작 그 위에 놓인 두 손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빼냈다. 그의 손이 생각보다 크고, 그리고 뜻밖에도 차갑지 않다는 사실이, 왜인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기사 출신이라던데, 검을 잡던 손이 왜 이렇게 부드러운 걸까. "공작님은 반죽을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궁금해서 그렇소."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사실이니까."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반죽을 다시 밀기 시작했는데, 그 서투른 손놀림이 우스워서 이서연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겨울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가진 이 나라의 공작이, 밀가루를 온몸에 묻히며 반죽을 밀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가 보면 믿지 않을 광경이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그 이목구비가 밀가루 범벅이 되어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이서연은 이 그림을 어디 화가에게 보여주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잠깐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이렇게, 이렇게 눌러야 해요." 그녀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어 방향을 잡아주었는데,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손등은 단단했고, 반죽처럼 부드럽게 다뤄지기를 기다리는 듯 가만히 있었다. 이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얼른 손을 뗐고, 조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반죽을 계속 밀었지만, 그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다는 것을 이번만은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공작님, 귀가……" "주방이 덥소." 한겨울 설한국의 주방이 더울 리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서연은 굳이 그 사실을 짚어내지 않았다. 대신 못 이기는 척 화롯불을 슬쩍 살펴보는 시늉을 하며 웃음을 삼켰다. 그가 저렇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면, 아무리 무뚝뚝해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공작님은 원래 기사셨다고 들었어요." 그 말에 조하준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는 반죽 위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소. 지금도 검을 놓지는 않았소." "전장에……, 나가신 적 있으세요?" "몇 번." 그가 짧게 대답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그 팔뚝에 남은 옅은 흉터 하나가 이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오래 지나 옅어졌지만, 분명 깊게 벤 상처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순간 무언가를 묻고 싶었다. 어디서, 왜, 얼마나 아팠는지. 하지만 그의 표정이 이미 다시 굳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말을 삼켰다. 아직은, 서로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나눌 만큼의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말씀해 주세요." "……언젠가." 그가 그렇게 짧게 답하며 다시 반죽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이서연은 그 대답 속에 담긴 작은 여지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유예였다. 이서연은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녀들이 상을 치우는 소리, 화롯불이 사그라드는 소리가 저택 안을 채우는 동안, 이서연은 홀로 창가에 서서 눈 덮인 정원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손이 겹쳤던 순간, 귀가 붉어졌던 순간, 그리고 언젠가라는 그 짧은 대답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직 그것에 이름을 붙일 자신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하기엔 너무 이르고,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마음에 걸리는, 그런 애매한 지점에 그녀는 서 있었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저 눈처럼, 마음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쌓여가는 걸까. 이서연은 유리창에 서린 입김을 손끝으로 닦아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손끝에 남은 밀가루 냄새가 아직도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고, 그 냄새는 이상하게도 낮의 그 순간들을 자꾸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때, 문 밖에서 집사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정중하고 느긋한 걸음과는 확연히 다른, 급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였다. "공작님! 명화국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이서연의 심장이 이유 없이 덜컥, 내려앉았다. 명화국이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낯설면서도 불길하게 들리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복도 저편에서 다급하게 오가는 발소리와, 문틈으로 새어드는 낮고 굳은 목소리들이, 오늘 낮의 그 다정했던 순간들을 순식간에 밀어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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