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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비행기가 떨어질 때, 나는 패를 세고 있었다. 마카오 VIP룸, 판돈 470억. 딜러의 손끝이 움직이는 속도, 옆자리 큰손의 눈동자 떨림, 창밖 날씨까지 계산에 넣던 참이었다. 뭐 그런 걸 세다가 죽는 인생이라니. '이거 참, 죽기 직전까지 계산기 돌리는 인생이라는 게.' 창밖에서 엔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도 나는 확률을 계산했다. 비상구까지의 거리, 낙하산 유무, 기체 각도. 생존율 3퍼센트. 낮았다. '그래도 3퍼센트면 서른일곱 판 중에 한 번은 이겼던 확률이잖아.' 낙관이라기엔 좀 웃긴 위로였다. 그리고 그 3퍼센트가 아니었다는 걸, 나는 지금 알았다. 눈을 뜨니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 서까래, 종이로 바른 창문, 향 냄새. '여기가 어디야.' 비행기 안이었다면 이런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온기도 낯설었다. 온돌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이상했다. 너무 가늘었다. 손가락도 낯설었다. 서른일곱 판 승부를 이겨온 손이 아니었다. 카드를 섞을 때 늘 걸리적거리던 반지 자국조차 없었다. '이거 완전 딴 몸이잖아.'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노인 하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었다. 허리가 굽고,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남자였다.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으려다 참았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먼저다. 프로 도박사의 첫 번째 원칙, 패를 다 보기 전엔 입 열지 마라. 두 번째 원칙은, 상대가 먼저 말하게 만들어라. 노인은 내 손을 붙잡고 맥을 짚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짜로 걱정하는 손이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적은 아니겠네.' "박우현입니다, 도련님.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우현. 그 이름이 뭔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니, 익숙한 게 아니라 머릿속에 그냥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알던 것처럼. 집사, 라는 단어도 함께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봐온 얼굴이라는 감각까지 딸려 왔다. '이게 뭐야.' [정보 병합 감지: 원 소유자의 기억 일부가 표면화됩니다.] 허공에 반투명한 글자가 떴다. 놀랄 힘도 없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이제 상태창까지 뜨는구나. '이러면 뭐, 옛날에 하던 게임이랑 똑같잖아.' 그것도 튜토리얼도 없이 던져진 게임. 불친절함으로 치면 만렙 난이도였다. 나는 손을 들어 눈앞의 글자를 확인했다. [강준서, 17세] [가문: 동운시 강씨 가문 / 직계 3남매 중 장자] [체질: 무공 자질 극히 낮음 (하위 1% 이내)] [상태: 허약] 음. '무공 자질 극히 낮음이라니, 이거 참 시작부터 유쾌하네.' 서른일곱 판 이겨온 도박사가 이번엔 몸빵으로 지고 시작하는구나. 카드는 늘 좋게 뽑았는데 캐릭터 롤은 최악으로 뽑힌 셈이었다. 박우현이 내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 "도련님, 나흘째 열이 안 떨어져서 저는 정말..." 나흘. 나흘 동안 이 늙은 집사는 옆을 지켰다는 뜻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지, 얼굴에 새겨진 주름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우현 어른." 나는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제가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우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도련님, 말투가..." 아, 이런. 너무 정중했나. 도박판에서 몸에 익은 말투가 있었다. 상대를 안심시키는 말투, 그리고 지금 그게 열일곱 짜리 도련님한테는 안 맞는 옷이었나 보다.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나 봅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열도 나흘째고, 머리도 어디 부딪혔다고 하면... 뭐, 그럴듯하잖아.' 박우현은 잠시 나를 살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이 완전히 풀린 표정은 아니었지만, 일단 넘어가주는 얼굴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도련님, 마음을 굳게 잡으셔야 합니다." 노인의 눈이 다시 젖었다. "가주님께서... 5일 전, 화운산에서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가주님. 원 소유자의 기억이 다시 표면 위로 떠올랐다. 아버지. 강태을. 동운시 9대 귀족 중 하나, 금강류 3단계 강자. 아들의 병을 고칠 영약을 찾겠다고 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죽었다는 거군.' 이상하게 마음이 먹먹했다. 내 아버지가 아닌데. 그래도 이 몸이 기억하는 아버지였다. 기억 속에서 그 남자가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 앞에서만 짓던 웃음이라는 감각까지 같이 왔다. 몸과 기억이 반쪽씩 뒤섞였다는 게, 이런 식으로 확인되는구나 싶었다. '남의 아버지 죽음에 이렇게 마음이 아프다니, 이거 좀 곤란한데.' "장례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치렀습니다. 도련님이 깨어나시길 기다리며 조문객만 정리해두었지요." 박우현의 목소리에 원망이 섞여 있었다.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는 몰라도. 가주가 죽은 집안치고는, 조문객 정리라는 말이 너무 사무적으로 들렸다. '뭔가 있구나.' 도박판 있으면 항상 있는 것. 숫자보다 먼저 셈해야 하는 것. 바로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였다. 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다. 곱게 단장한 여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열여덟쯤 되었을까, 화려한 비단옷을 걸쳤는데 표정은 그 옷값에 어울리지 않게 차가웠다. 걸음걸이마저 도련님 병문안이라기보다 계약 파기 통보하러 온 사람 같았다. "어머, 깼네." 여자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누구...' [정보 병합: 임서윤, 정혼자] 아, 이 사람이구나. 정혼자. 그 단어를 듣자마자 원 소유자의 기억이 함께 밀려왔다. 어릴 때 손을 잡고 웃던 기억,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그 웃음이 점점 사라졌다는 감각까지. "서윤 아가씨." 박우현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임서윤은 나를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마치 상품 값을 매기는 눈이었다. "가주님도 안 계신데 살아서 뭐해. 어차피 무재도 없잖아." 와. 첫마디부터 이거다. '약혼녀 배신이라는 게, 죽고 정신 차리자마자 이렇게 빨리 오나.' 드라마에서 보던 클리셰가 실전으로 오니 은근히 신선했다. 신선하다고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래도 약혼자한테 그런 말은 좀..." 나는 최대한 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약혼은 가주님이 계실 때 얘기지." 임서윤이 딱 잘랐다. "지금은 그냥 애물단지 하나잖아, 안 그래?" 애물단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원 소유자의 기억 어딘가에서 뭔가가 조용히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니었지만, 이 몸은 그 말을 오래 들어왔던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참았던 거야, 이 몸은.' 박우현이 뭐라 말하려는데 임서윤이 먼저 방을 나가버렸다. 문이 세게 닫혔다. 문틀이 흔들릴 정도였다. 정적. "도련님, 죄송합니다. 서윤 아가씨가..." "아뇨, 오히려 좋은 정보였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박우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야.' 패를 상대가 먼저 까면, 그건 그 사람이 손해다. 임서윤은 방금 자기 손의 패를 다 보여준 거였다. 가주가 죽은 지 5일, 그것도 정신을 못 차리는 정혼자 앞에서 저렇게 이해관계를 드러낸다는 건, 저쪽도 뭔가 급하다는 뜻이었다. '조급한 쪽이 항상 패를 먼저 깐다.' 그건 마카오에서도,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인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힘이 이렇게 없나. '이 정도면 팔씨름도 애들한테 지겠다.' 아니, 애들이 아니라 강아지한테도 질 것 같았다. "도련님, 아직 무리십니다." 박우현이 다급히 부축했다. 노인의 팔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평생 도련님을 부축해온 팔이라는 게 느껴졌다. "우현 어른." 나는 그를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제 몸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박우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답을 하기 전에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도련님은... 무공을 배울 그릇이 아니라고, 3년 전에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무공을 배울 그릇이 아니다. 그 말이 방 안에 묵직하게 떨어졌다. 창호지 너머로 바람 소리가 스쳤다. 이 세계에서 그 판정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원 소유자의 기억이 조용히 알려주었다. 귀족 가문 장자로 태어나 무재가 없다는 건, 그냥 재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존재 자체가 실패작이라는 낙인이었다. [상태 재확인] [단전 크기: 최하위 등급] [내공 수용률: 3% 미만] 숫자를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숫자는 확실하니까. 확실한 숫자는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불확실한 감정보다, 확실한 데이터 쪽이 언제나 다루기 쉬웠다. '좋아, 그럼 계산해보자.' 죽어서도 도박사 근성은 안 죽는구나.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고, 남의 몸에 들어와서, 아버지 죽음에 슬퍼하고, 정혼자한테 버림받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결국 나는 숫자를 세고 있었다. '생존율 3퍼센트, 그거 이번엔 진짜로 이긴 거 맞나.' 내공 수용률 3퍼센트 미만. 아까 그 비행기 생존율이랑 똑같은 숫자였다. '이거 무슨 계시야, 아니면 그냥 우연이야.' 박우현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나는 속으로 패를 하나씩 다시 정리했다. 가주는 죽었고. 약혼자는 이미 손을 뗐고. 집안에서 나는 애물단지고. 무공은 배울 수도 없는 몸이고. 이 정도면, 도박판에서 흔히 말하는 '올인 직전의 최악의 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이 떨리지 않았다. '서른일곱 판 이겼던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이제 와서 잃을 것도 별로 없다는, 그 나름의 편안함일 수도 있었다. 나는 몸을 다시 눕히며 천장을 봤다. 서까래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낯설었다. 낯설지만,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좋아, 이 판은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방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였다. 박우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도련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우현 어르신! 큰일 났습니다! 화운산에서... 화운산에서 시신을 찾았다고 합니다!" 시신. 방금 장례를 치렀다던 그 산에서, 또 다른 시신이 나왔다는 말이었다. 박우현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은 채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판이 복잡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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