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굴러떨어지는 동안 시야가 온통 흙빛과 풀빛으로 뒤엉키며 회전했고, 등에 멘 케이스가 몸을 몇 번이나 세게 때리는 통증이 갈비뼈께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어깨가 돌부리에 긁히고 무릎이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히는 감각이 연달아 지나갔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케이스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팔로 감싸 안았다. 마흔한 해를 산 몸으로 이런 낙법을 구사할 줄은 몰랐지만, 사람이 죽기 직전이 되면 별의별 재주가 다 나오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숨이 턱 막혔지만, 나는 그 통증조차 사치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지금 이 순간 아픈 소리를 내는 건 사치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린 듯했다.
옆을 보니 은서가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신음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다행히 품에 안은 피그말리우스는 여전히 그녀의 팔 안에 무사히 들어 있었다. 저 조그만 몸으로 그 짐승 발톱보다 먼저 챙긴 게 저 인형이라니, 이 판국에도 우선순위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괜찮아?" 내가 묻자 은서는 몇 번 기침을 하고 나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흙먼지가 목에 걸렸는지 캑캑거리는 소리가 좀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사지가 다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어, 어. 근데 그 짐승은." 그녀의 말에 나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는데, 우리가 굴러떨어진 구멍의 입구가 저 위에서 둥그렇게 빛나고 있었고, 그 가장자리로 검은 형체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다. 짐승도 눈치는 있는 모양인지, 구멍 아래로 몸을 들이밀 생각까진 없어 보였다.
"저건 여기까지는 안 쫓아오나 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확신은 없었기에 목소리를 낮췄다. 확신 없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것, 이것도 상급자다운 요령이라면 요령이겠지. 우리가 떨어진 곳은 지하 공간이었는데, 위에서 스며드는 빛 덕분에 어렴풋이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벽면은 흙과 돌이 뒤섞인 재질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곳곳에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되어 갈라진 대리석 조각들이 깔려 있었다.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보니 매끈하게 마모된 결이 느껴졌는데, 자연적으로 생긴 지형이라면 이렇게 균일하게 닳을 리가 없었다. '이거 자연 지형이 아니라 무너진 건축물 같은데.'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시선 끝에 낮게 걸린 붉은빛 문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 새겨진 그 문양은 마치 오래전에 그려진 지도의 일부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저 위에서 짐승이 언제 다시 코를 들이밀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고학자 흉내를 낼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도윤아, 이거 봐."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어른 몸통 굵기의 통로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입구 근처 바닥에 뭔가 반짝이는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는 그 조각들은, 자연광이 거의 닿지 않는 이 공간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다가가 그것을 주워 들었는데, 손바닥만한 크기의 금속 조각으로, 표면에 낯선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으며 만질 때마다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온기가 느껴진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말이 되는 일이 몇 개나 있었는지 헤아려보면 그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건 또 뭔데.' 나는 그 조각을 뒤집어 보며 생각에 잠겼다. 뒷면에도 앞면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다만 그 배열이 조금 달랐다. 무슨 순서라도 있는 건가 싶어 몇 번이고 뒤집어 봤지만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마흔한 해를 살면서 이런 걸 본 적은 없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오래전 꿈에서 본 듯한 것처럼,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그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거 뭐야?" 은서가 목을 길게 빼고 물었다. "몰라. 근데 만지니까 따뜻해." 내가 그렇게 대답하며 조각을 건네자, 그녀는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네. 이거 배터리 같은 건가?" "배터리였으면 진작 우리 둘 다 감전됐겠지." 나는 실없는 소리를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이 조각이 단순한 장식품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문양이 새겨진 금속에 온기가 흐른다는 건, 이 세계의 물리법칙이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게 짜여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조각을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통로 쪽을 살폈다.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며 통로 안쪽을 살피자, 은서는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안을 들여다보았다. 통로 안쪽에서는 미약하게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가 흙냄새와는 다른, 마치 오래된 금속과 습기가 뒤섞인 냄새였다. 코끝을 스치는 그 냄새는 지하실 특유의 곰팡내와도 달랐고, 오히려 오랫동안 방치된 기계실 같은, 쇠 비린내와 물기가 함께 도는 냄새였다.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맞을까?" 은서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위에는 그 짐승이 있고, 여기 그냥 있어도 답이 안 나오니까, 일단 앞으로 가 보는 게 낫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 선택이 옳은지 확신이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선택지가 어디 있겠나, 있는 선택지 중에 덜 나쁜 걸 고르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마흔한 해 살면서 배웠으면서도, 그 순간마다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초원 아래 무언가가 파묻혀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이 우리가 각성한 이 세계의 정체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그럼 내가 앞장설게." 은서가 그렇게 말하며 발을 떼려 하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아니, 내가 앞에 서지." "왜?" "짐승이 뒤에서 튀어나오면 최소한 케이스 멘 사람이 먼저 맞아야 공평하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은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아까보다 조금은 편해 보여서, 나도 괜히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등을 나란히 하고 통로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발밑에서 부서진 돌조각이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서,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 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통로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문양들 사이로 희미한 청록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벽 틈에 낀 이끼가 빛을 내는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문양 자체가 발광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명멸하는 그 빛은, 우리 발걸음에 맞춰 밝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듯도 했다. 나는 등 뒤에 멘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무게를 다시 한 번 느끼며, 이 낡은 명기가 왜 하필 이 세계에, 하필 은서의 손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점점 더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악기 하나 짊어지고 이런 던전 같은 곳을 헤매고 있자니, 예전 삶에서 콘서트홀 무대에 오르던 기억과 지금이 너무 동떨어져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윤아." 은서가 낮게 부르며 걸음을 늦췄다. "왜." "이 통로,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바닥은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걸을 때마다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네." 나는 짧게 대답하며 앞을 계속 살폈다. 통로는 좁아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넓어졌고, 그 굴곡마다 벽에 새겨진 문양의 밀도가 달라졌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이 길을 설계라도 한 듯, 특정 구간마다 문양이 더 촘촘하게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통로 저 안쪽에서 낮고 규칙적인 진동음이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그 소리가 마치 무언가의 심장 박동처럼, 우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은서의 손이 내 팔을 슬쩍 붙잡았고,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면서도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속으로는 저 진동음의 정체가 무엇일지, 그것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건지 가늠하며 발끝의 감각을 곤두세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