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 우리 왜 어려졌어?

1화

풀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눅눅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이상하게 선명한 초록의 냄새였는데,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 죽었구나'였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마흔한 해를 살아온 인간이 죽음의 순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게 편의점 야간 알바 시급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두 번째로 떠올린 생각이 '그럼 이제 시급은 안 받아도 되는 건가' 라는 실없는 계산이었다는 것도, 나는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내가 나답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다. 세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더 한심했는데, 죽으면 밀린 월세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것이었다. 죽어서까지 통장 잔고를 걱정하는 인간이라니, 이쯤 되면 청산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하늘이 보였는데,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고, 그 위로 낮게 깔린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풀잎들이 일제히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서울 하늘에서는 본 적 없는 색이었다. 미세먼지도, 매연도, 고층 건물의 그림자도 없는, 그냥 순수하게 파란색만 존재하는 하늘. 나는 그 낯선 순도에 잠시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이 작았다. 손등에 있던 힘줄, 오랜 연습으로 굳어버린 왼손 손끝의 굳은살, 마흔이 넘어가며 늘어난 기미 자국까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채로, 마치 열네댓 살짜리 소년의 손이 거기 있었다. '이거 뭐, 회춘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손을 뒤집어 보고 손등을 꼬집어 보고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만져지는 얼굴선이 낯설도록 매끈했다. 턱 아래 늘어져 있던 살도 없었고, 콧대 옆에 자리 잡았던 여드름 자국도 없었다. 죽기 전 내 몸은 이렇지 않았다. 서른아홉에 오케스트라에서 잘리고, 마흔에 아내와 이혼하고, 마흔한 살에는 술과 편의점 알바로 하루를 버티다 결국 원룸 바닥에 쓰러진 게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바이올린을 십오 년 잡았던 손인데, 정작 마지막 몇 년은 활 대신 편의점 바코드 스캐너를 잡고 있었다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지연이 데려간 딸 하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유치원 졸업식이었나, 아니면 그보다 더 전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더 정확히는 이 낯선 몸으로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었다.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우자 시야에 들어온 건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었고, 그 초원 위로 낮게 스치는 바람과 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무언가가 지평선 근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다가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잠깐 휘청거렸는데, 그 휘청임조차도 낯설었다. 마흔한 살의 몸은 무게 중심을 잡는 데 익숙했는데, 이 열다섯 살짜리 몸은 뭐랄까, 지나치게 가벼웠다. 팔다리가 붕 뜬 느낌이랄까.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짐을 내려놓았을 때 느끼는 그런 허전한 가벼움과 비슷했다. 나는 그 반짝임이 도시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왜 알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넣은 듯한 감각이었는데, 그 감각조차 낯설어서 나는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 두고 시스템이니 각성이니 하는 건가.' 살아 있을 때 딸과 함께 본 이세계 판타지 애니메이션 몇 편이 갑자기 유용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딸 옆에서 하품을 참으며 억지로 봐줬던 것뿐인데, 이렇게 실전에 쓰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은, 아니, 죽음 이후의 삶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는데, 관절 어디에도 통증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오른쪽 어깨의 건염, 목뒤로 뻗어 나가던 신경통, 허리를 굽힐 때마다 찌릿하게 올라오던 디스크 통증, 그 모든 게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십오 년 동안 활을 잡으며 쌓인 통증이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리셋되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서운하기도 했다. 그 통증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아온 증거였는데. 열다섯 살짜리 몸이라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 당연함이 지금의 내겐 기묘한 서글픔으로 다가왔다. 몸은 젊어졌는데, 그 안에 든 건 여전히 마흔한 해를 산 늙은 영혼이라는 사실이, 그게 못내 우스웠다. 겉은 신상인데 속은 완전히 중고, 그것도 폐차 직전의 중고차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나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옷차림을 살펴보니 회색빛이 도는 낡은 셔츠와 무릎 부분이 해진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발밑에는 낡은 가죽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신발 밑창이 거의 다 닳아 있는 걸 보니,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꽤 오래 걸어 다닌 모양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셔츠 자락을 만져 보았다. 거친 천의 질감이 낯설게 손끝을 자극했는데, 공장에서 나온 기성복이 아니라 누군가 손으로 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세풍인가, 아니면 그냥 가난한 동네인가.'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지만, 적어도 내가 알던 21세기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풀숲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원은 완만한 구릉을 이루며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고, 곳곳에 낮게 자란 관목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뭔가 색이 다른 것이 눈에 걸렸다. 회색과 갈색이 뒤섞인 초원 위에, 유독 하얀 색이 드러난 지점이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응시했는데, 그것이 천천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하얀 꽃무리이거나, 바람에 날려 온 천 조각인가 싶었다. 이 넓은 초원에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으니까. 옷자락이었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옷자락이 관목 사이에 늘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뻗어 나온 형체는 분명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심장이 갑자기 빨라지는 걸 느끼면서도 다리를 움직였다. 이 낯선 세계에서 마주친 첫 번째 인기척이 하필이면 쓰러진 사람이라는 게,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전개라는 생각이 스쳤다. '살아 있는 건가, 아니면 나처럼 방금 도착한 건가.' 죽어서 이 세계로 넘어온 게 나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낯선 다리의 가벼움에 살짝 휘청거리면서도, 나는 그 형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초원의 풀들이 발목을 스치는 감각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저 하얀 형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으로 번져 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얀 옷자락의 형태가 더 뚜렷하게 보였는데, 옷의 재질이 내가 입고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칠고 조악한 내 옷과 달리, 그 옷은 매끈하고 광택이 도는 재질이었고, 소매 끝에는 은실로 놓은 듯한 자수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형편이 나은 사람이었나 보군.' 그런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나는 저 자수의 정교함이 결코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바람이 또 한 번 불어와 그 옷자락을 흔들었고, 그 틈으로 팔 하나가 드러났다. 가늘고 하얀 팔이었는데,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단순히 낯선 몸에 적응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저 형체가 정말로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흔한 해를 살면서 시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병원에서 몇 번 부고를 접한 게 전부였는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향하고 있는 게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 낯선 세계에서의 첫 경험이 꽤나 험난하게 시작되는 셈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관목 사이로 늘어진 그 형체의 윤곽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로 풀밭 위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색이 은백색에 가까웠다. 사람의 머리색이라기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색이었지만, 이미 회춘이라는 비현실을 겪고 있는 나로서는 그 정도 색깔쯤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나는 몇 걸음 더 다가가서 그 형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고, 얼굴 반쪽이 풀숲에 파묻힌 채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어깨를 흔들어 보려 했는데, 손끝이 그 몸에 닿기 직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 얼굴이, 미동도 없이, 너무나 고요하게,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정지해 있을 수 없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손끝을 그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인간의 살갗과는 다른, 미묘하게 서늘하면서도 매끈한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그 순간 그것이 단순히 쓰러진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거두지도 뻗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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